2년 전 제안한 중환자실 입퇴실 우선순위, 제자리걸음
중환자의학회 박성훈 이사 “한국 중환자실은 후진국 수준”
"1인실·준중환자실 준비해 일반-감염병 환자 동시 진료 가능해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중환자 입·퇴원 과정에서 생긴 논리와 윤리적 책임은 사실상 현장 의료진한테 떠넘겨져 왔다.”

대한중환자의학회 박성훈 중환자실표준화이사(한림대성심병원 호흡기내과)는 지난 12일 대한의사협회가 개최한 ‘오미크론 대유행 이후 코로나19 미래와 대책’ 세미나에서 이같이 말하며 문제가 생기면 현장 의료진이 책임지는 구조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환자의학회가 지난 2020년 8월 중환자실 입·퇴실 우선순위를 마련해 정부에 제안했지만 2년 가까이 논의에 진전은 없다. 의료자원은 한정된 상태에서 위중증 환자가 급증하면 살릴 수 있는 환자도 놓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에 ‘회복 가능성이 지극히 낮은 환자’는 중환자실 입실을 제한하는 방안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유럽중환자의학회(European Society of Intensive Care Medicine, ESICM) 권고 사항을 예로 들며 중환자실 입·퇴실 우선순위가 의료 현장에 적용되려면 사회적 합의를 거쳐 법적 보호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SICM은 국가마다 중환자 분류 기준을 개발하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되 이는 지역 임상 상황과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또 병원 지도부는 정부와 긴밀히 협의해 병원에 환자분류시스템을 도입하기 전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선의의 목적으로 합의된 기준에 따라 일관되게 중환자분류시스템을 적용하면 보호받을 수 있다고 임상의들에게 알려야 한다.

대한중환자의학회 박성훈 중환자실표준화이사는 지난 12일 의협 용산임시회관에서 열린  ‘오미크론 대유행 이후 코로나19 미래와 대책’ 세미나에서 중환지 진료 대책을 발표했다.
대한중환자의학회 박성훈 중환자실표준화이사는 지난 12일 의협 용산임시회관에서 열린 ‘오미크론 대유행 이후 코로나19 미래와 대책’ 세미나에서 중환지 진료 대책을 발표했다.

박 이사는 “미국중환자의학회가 마련한 중환자실 입실 기준과 우선순위를 바탕으로 우리도 우선순위를 정하고 프로토콜을 마련했다”며 “우리나라 사정 상 4가지 우선순위 중 마지막 단계인 생존 가능성이 매우 적은 말기암이나 심한 뇌출혈, 말기장기부전 환자의 경우 중환자실이 부족하면 우선순위를 뒤로 하자는 게 중환자의학회 안”이라고 말했다.

중환자의학회가 코로나19 팬데믹처럼 재난 상황 시 중환자실 입실 제한 대상으로 제시한 ‘국제적으로 회복 가능성이 지극히 낮을 것으로 합의된 환자’는 ▲뇌·심장·간·신경근골격계 등 말기장부전 ▲예측 사망률이 90% 이상 중증외상/중증화상 ▲대량 뇌출혈, 중증 치매 등 시각한 뇌기능장애 ▲기대여명 6개월 이하인 말기암 ▲ASA Score Ⅳ(생명을 위협할만한 심한 신체질환)-Ⅴ(생존이 어려운 빈사상태) ▲예측 생존율 20% 이하다.

박 이사는 “학회 임의대로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국민들이 동의해 줘야 한다. 그래서 정부가 나서서 국민을 이해시키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주기를 바랐다”며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고 아쉬워했다.

박 이사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국가가 주도해서 의료계와 시민사회단체, 종교계, 법조계가 (중환자실 입퇴실 기준과 우선순위 등에 대해) 합의를 해서 법제화돼야 적절하게 이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1인실이 아닌 다인실 중심인 중환자 진료 시스템도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이사는 “그동안 중환자의학회에서 여러 가지를 제안하고 주장했지만 크게 개선된 사항은 없었다”며 “일반 중환자뿐만 아니라 감염병 중환자도 같이 볼 수 있는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박 이사는 “현재 많은 중환자실이 오픈 시스템인데 이를 개선해야 한다. 1인실과 격리실, 준중환자실을 준비해서 팬데믹으로 감염병 중환자가 생기더라도 그 환자들을 위한 병상으로 빠르게 전환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며 “중환자 의료 인력도 한달 만에 확충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미리 준비하고 팬데믹 시 동원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박 이사는 “선진국들은 이미 1인실이 많기 때문에 감염병이 대유행해도 대응하기 위해 별도로 큰 공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박 이사는 “중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들은 ‘의료 선진국’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나라 중환자 진료체계는 후진국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선진국과 같은 결과를 바라고 새로운 대응 전략을 짠다는 것 자체에 괴리감이 있다”며 “감염병 재난 상황에 대한 중환자 진료체계는 평상시 중환자 진료체계 수준을 향상시키는 게 답”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이에 중환자실 의료 인력을 확충하고 준중환자실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또 병원마다 중환자실 등급을 나눠 상향 평준화할 필요가 있으며 중환자실 특성에 따라 수가도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