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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기회를 준 것은 그이 침착함 때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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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기회를 준 것은 그이 침착함 때문이 아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06.13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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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수는 세 번의 살인을 저질렀다. 한 번은 과실치사였다. 통영에서 배를 탈 때 파도가 심했다. 항구를 바로 앞에 두고 배가 침몰 위기에 몰렸다.

선장은 사색이 됐고 선원들은 공포에 질렸다. 배는 제어 할 수 없었다. 돛은 부서졌고 옆구리에서 물이 들이찼다.

죽음의 순간 앞에서 선원들은 이성을 잃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들은 평소 불만이 많았던 선장을 제 손으로 죽이고 싶어했다.

가만히 나둬도 죽을 목숨이지만 그동안 사무친 원한을 그런식으로 풀고 싶어했다. 말수라고 다를리 없었다. 종보다도 더 심한 학대를 당하고도 변변히 먹지도 입지도 못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그의 분노가 더 심했다.

그러나 그는 예리한 낫으로 선장의 뒤를 치려던 선원을 밀쳤다. 그런 식으로 사적 보복에 대한 결론이 일기 전에 우선 배를 살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무래도 이런 때는 선장이 있어야 했다.

그라면 가라 앉는 배를 구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나머지는 사탕을 본 울던 아이처럼 바람이 뚝 그치는 기적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을 말수는 바라지 않았다.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늘은 뚫린 듯 비가 쏟아졌고 파도는 더 거셌으며 그로 인해 보이던 마을의 불빛마저 사라져버렸다.

멀찍이서 손을 까부는 것이 엄마의 손인지 낫을 든 청년 아버지의 손인지 알지 못했다. 말수는 눈을 비볐다. 그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하던 일을 마저 하고 죽더라도 죽어야 한다.

선장을 살린 것은 그가 살아야 할 가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언제든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할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말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선장을 향해 달려드는 선원을 밀쳤고 그 바람에 쓰러진 그는 죽어야 할 대상이 선장에서 자신으로 바뀌었음을 눈치챌 무렵 저승길로 떠났다.

한 손에 쥔 낫을 겨누면서 다가오던 선원은 말수가 밀치던 그 순간 더 큰 파도가 치는 바람에 뒤로 나가떨어졌고 하필 뒷머리가 어망의 뾰족한 곳에 박혀버렸다.

그가 지르는 비명과 눈을 뚫고 나온 쇠붙이에 붙은 피가 빗물에 씻겨 나가는 것을 말수는 빗물 사이로 설핏 보았다. 용서를 구하는 말수의 목소리는 떨렸다.

신부님은 그런 일은 직접 살인이 아니니 충분히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만하다고 안심시켰다. 말수는 말을 이었다. 두 번째 살인에 대해 말을 할 때 신부는 그가 이번에는 조금 더 빨리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였는지 요지만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말수는 감정을 추스르고 가능하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진술하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그날따라 빨리 고해성사를 마치고 쉬고 싶었던 신부는 그런 말수 대신 언제 죽였나요, 어디서 죽였지요. 왜 죽였나요, 의 세 마디만 짧게 대답할 것을 요구했다.

말수는 신부의 의도를 눈치챘다.

‘신부님, 오늘은 더는 못하겠어요.’

신부는 자신의 말을 곧 후회했다. 그가 멈춘다면 자신만이 알고 싶었던 살인의 비밀이 허사가 되기 때문이다. 내일은 자신의 당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부는 내일 대신 오늘 저녁에 하자고 말수에게 역제의 했다.

말수는 그러고 싶지 않았으나 신부가 간청하는 바람에 덜컥 수락할 뻔했다. 그러나 말수는 입 밖에 다 나온 그 말을 주워 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 아니면 할 수 없다고 버텼다.

바로 통영으로 가야 한다고 핑계를 댔다. 신부는 경상도 통영이라는 말에 멀리서도 왔다며 그렇다면 계속해서 두 번째 살인의 고백을 털어 놓아도 좋다고 허락했다. 

말수가 전주의 진동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하게 된 것은 이곳에 왔다가 고해성사나 하자는 친구의 꾐에 빠졌기 때문이다.

당시 친구는 성당에 깊이 관여했는데 신부는 고해성사 받는 것을 매우 좋아해 누구라도 좋으니 하루에 한 명은 반드시 고해실에 오도록 만들었다.

신도들은 모두 돌아 가면서 두 어 차례 있는 것 없는 것, 다 만들어 가면서 신부의 욕심의 채워줬다. 그러나 신부는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신도만으로는 곧 한계에 다달았다.

그래서 일가친척들이 동원됐고 말수까지 차례가 온 것이다.

구사일생으로 배에서 살아난 말수는 더는 배를 탈 수가 없었다. 말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선장이 배 수리를 끝내고 다시 자기 배로 올 것을 요구했으나 말수는 거절했다.

감히 자신의 명령을 거부한 말수에게 선장은 분풀이를 했다. 이래도 내 놈이 내 말을 거역해, 하는 심사였다. 앙심을 품은 선장은 말수네가 하던 소작을 억지로 빼았았다.

소작이 없다면 말수네는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굶어 죽을 판이다. 이판사판 심정으로 쫓기다시피 밀양의 먼 친척 동네로 야밤 도주한 말수는 그러기 전날 밤 이 정도면 됐다 싶을 정도로 풀 베던 낫을 여러 번 갈았다.

낫보다 숫돌이 더 반질거릴 정도가 돼서야 말수는 엄지의 안쪽으로 갈린 낫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때만 해도 말수는 선장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죽인다고 생각했다고 다 행동에 옮기는 세상에 남아날 사람이 있겠는가.

위협을 하고 도로 소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빌면 목숨만은 살려둘 심산이었다.

말수는 새벽녘 선장이 자고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낫을 목에 들이댔다. 옆에서 자고 있던 부인이 깨서는 사태를 확인하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얼마나 공포가 심했던지 말조차 하지 못하고 전신 마비 환자처럼 무의식적으로 몸만 꿈틀댔다. 부인을 봐서도 차마 낫질을 할 수 없었다. 말수는 망설였다. 

선장은 목숨을 재촉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는 그는 되레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말수를 겁박했다.

참을성 있는 말수는 그 말에도 겨누고 있던 낫을 바로 선장의 목 쪽으로 찔러 넣지 않았다. 한 번 더 기회를 준 것은 말수의 그런 침착함 때문이 아니었다. 선장 부인이 그때 말을 했던 것이다.

‘어서 저놈을 죽여요.’

말수는 어이가 없어 부인을 쳐다봤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부인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낫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 양반에게 대든다.’

말수는 지체하지 않았다.

무식쟁이가 그 낫을 휘둘렀다.

그 말을 듣던 차양 너머의 순간 순간 헉 하는 소음을 냈다. 낫이 자신의 목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둘씩이나 죽인 말수의 정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밀양에 도착한 다음 날 그는 조선을 떠나기로 했다. 마침 일본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전갈이 떠돌았다. 말수는 배에 몸을 실었다.

‘기억나요. 갑판에서 시끄럽게 굴었죠. 그런 사람으로는 보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

‘네, 사람을 죽이는 그런 사람요.’

‘신부님이 용서했다.’

‘그래요? 선원도, 선장도 용서했을까요.’

‘그것까지는 몰라. 죽은 자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좀 무서워요.’

어둠 속에서 용희가 말했다.

‘왜 그런 이야기를 지금 해요.’

‘지금이 그때야.’

‘신부님은 용서한 것 맞나요.’

‘그러라고 신부가 있잖아.’

‘아, 정말 성당은 꼭 필요해요.’

‘우리 목숨도 살려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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