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석 단국의대 가정의학과 교수 

어제 우리 대학 교수비대위 총회에서 “저는 사직서 제출은 못 할 것 같습니다. 현재 항암치료 중인 소아암 환자들 때문에요...”라는 교수님 말씀에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아는 분이 별로 없으시지만, 사실 저는 국내 유일한 ‘파업 박사’입니다.

2000년 의약분업 당시 의사파업의 윤리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거든요. 당시에도 ‘사상 초유의 의료대란’, ‘생명을 다루는 소방관과 의사가 파업을 한 사례는 없다’... 등등 의사파업의 비윤리성을 성토하는 목소리들이 가득했습니다.

이런 비난들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속절없이 무너졌지요. 사태가 종료된 후, 의료윤리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한국 의료계의 집단행동에 대한 윤리적 반성과 함께, 지나치게 편향된 비난들에 대한 최소한의 변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는 들춰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오래된 제 논문을 꺼내 들었습니다.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니 어제 비대위 총회에서 오고 간 고민들에 대해 참고할 만한 내용들이 눈에 띄네요.

정유석 단국의대 가정의학과 교수
정유석 단국의대 가정의학과 교수

한국의사들의 파업이 특별한 사건인가요?

아닙니다. 과거에도 현재도 세계 각국의 의사들은 파업을 꽤나 자주 해 왔습니다. 총 118일간 장기 파업을 감행한 이스라엘뿐 아니라 영국, 캐나다, 프랑스, 스페인, 호주, 독일, 인도, 이탈리아, 브라질, 잠비아, 짐바브웨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른 나라 의사들은 왜 파업을 했나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의사파업의 가장 흔한 이유는 임금인상과 처우개선 요구입니다. 의사라고 해서 여타 직종들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에 불합리한 제도개선 등을 위해 투쟁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밥그릇 챙기기’라고 비난만 하는 것은 너무 편향적입니다. 우린 단 한 번도 보험수가 인상이나 처우개선을 해 달라고 파업을 한 적이 없습니다. 2000년, 2024년 모두 정부의 무리한 정책에 대한 반대 투쟁이니까요.

의사파업이 더 비난받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타 직종은 파업의 당사자가 노-사인데요, 의사의 파업은 의사-정부 간 힘겨루기이지만 실제 피해는 환자들이 본다는 점 때문입니다. 철도나 버스노조의 파업도 시민의 피해라는 점에서 본질이 유사하지만, 이땐 단지 불편함이지 생명의 위해는 아니기에 무게가 다르지요. 하지만, 다른 시각도 있습니다. 영국의 인류학자인 Brecher는 의사들의 파업이 ‘의사들의 복지증진을 위한 환자에의 손상’이라는 가정은 지나치다고 합니다. 많은 경우에 의사들의 염려는 환자들에 대한 염려였으며, 의사들이 부적절한 근무 환경, 고장 나고 오래된 의료장비, 불결한 병동 환경 등에 침묵하는 것이야말로 환자들에게 심각하고 장기적인 손상을 끼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파업에 의한 ‘환자의 손상’이라는 용어는 개개인의 환자뿐 아니라 사회 전체로서의 환자라는 개념을 인식하지 못한 속 좁은 편견일 수 있습니다. ‘만일 의사가 개인적인 환자와의 관계에만 도덕적이고 그 혜택이 특정 개인에게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는 지역사회의 건강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라고 설파한 사회학자 Veatch의 말도 귀담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견해들을 고려한다면, 의사의 파업 자체를 불가한 것으로 볼 수는 없고요, 자연스럽게 ‘의사파업의 한계’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의사파업의 한계는 무엇일까요?

행복추구권, 건강권, 생명권을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라고 할 때, 생명권은 건강권이나 행복추구권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의사파업은 사안에 따라서 국민의 건강권과 의사들의 행복추구권을 위한 투쟁일 수 있기에 어느 정도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환자의 생명권을 위협해서는 안 됩니다. 2000년 당시 의사들도 파업의 수위를 고민했습니다. 의사들은 응급실, 중환자실, 분만실, 투석실 등 필수진료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사표를 제출한 후에도 가운을 벗고 자원봉사의 형태로, 혹은 조직적인 참의료진료단의 형식을 빌려 환자들의 생명위해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막고자 노력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의사파업의 한계를 논할 때 고려해야 사항은 응급실, 중환자실 철수와 같이 환자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행위를 피해야 한다는 점과 수술 연기나 2, 3차 병원의 외래진료폐쇄도 장기화되는 경우는 간접적인 생명위해상황이 초래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사들이 반성할 지점은 없을까요?

이번 사태에서 정부가 언론을 완전 장악했지요. 의사들에 대한 비난 여론이 폭주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분들은 ‘의사들도 사정이 있겠지’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2,000명 증원 반대’라는 구호만 있지 대안이 없다고들 하더라고요. 안티테제가 뭐냐고 물어요. 필수의료의 붕괴, 지방의료의 소멸 등에 대한 의료계의 대안도 같이 제시해야 하는데, 그 부분이 부족하다는 비판입니다. 본 사태가 총선을 넘어 장기화 된다면 의사단체가 꼭 고려해야 하는 부분일 겁니다. 어찌 보면 2020년 공공의대 설립건은 이번 건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는데, 의사들은 언제나 반대만 한다는 시각을, 우리가 자초한 면이 있어요.

이번 사태에서 주목할 점은 무엇일까요?

이미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하고, 언론과 정부, 그리고 이에 경도된 시민들의 비난이 빗발치고 있지요. 하지만 저는 이번 사안만큼은 ‘밥그릇 지키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의사로 30여 년을 살아낸 저에게 10여 년 후에 배출될 의사수는 전혀 이해관계가 될 수 없거든요. 제가 가장 우려하는 바는, ‘낙수 효과’라는 용어로 대표되는 현 정부의 무모함이 필연적으로 의사-환자, 의사-의사 사이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는 수렁으로 빠뜨릴 것이라는 점입니다. 30여 년 의료윤리에 관심을 가지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중립적인 의사들이 더 도덕적 의사로 행위할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집단도 80-10-10의 법칙에 예외는 없어요. 10%의 성인반열, 10%의 악당들, 그리고 80%의 보통 사람들. 의사사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국가가 어떤 정책을 결정할 때 이 비율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는 것이 최우선 순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의 악당들이 설 자리를 잃고 성인반열의 비율이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해야 진짜 ‘좋은 정책’이라는 것이지요. 의사수가 급증하여 낙수효과로 마지못해 채워진 필수의료가 국민들을 행복하게 해 줄까요? 자칫 80%의 보통 의사를 더 상업적이고 경쟁적인 의료사업가로 내몰게 되지는 않을까요? ‘의사 만들기’가 입시학원의 온라인 수업으로 가능한 일인가요? 의학교육은 철저한 도제식 교육으로 이루어져 왔고 이는 의학의 오랜 전통이자 자랑입니다. 아무 준비도 없이 내년부터 3배의 학생을 교육하라고 명하면 그냥 되는 건가요? 불량품들이 쏟아져 나올 텐데, 국민들은 정녕 자신들의 미래를 그들에게 맡기고 싶으실까요?

L 교수님, 궁금한 사항들이 다소 해소되셨을지요?

지난 한 달여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다들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믿습니다. 어제 비대위 총회 직후 바로 지방 미니의대인 저희 대학의 정원이 40명에서 120명으로 늘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가슴에 대못이 박힌 기분입니다. 봄기운이 완연한 캠퍼스에 저희 제자들 얼굴은 자취가 없는데, 보이지 않는 그 얼굴들에게 너무 미안합니다.

이번 사태가 제게 던진 새로운 윤리물음은 ‘사제윤리’입니다.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학생이나 전공의들에게 실질적인 피해상황이 발생하면 사직하겠다고 하셨고 절차가 진행중입니다. 초중증 혹은 초응급 환자를 담당하는 대학병원 교수들의 사직이 현실화된다면, 위에서 제가 언급한 파업의 한계, 즉 임계점을 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럼 어떡하지...?’ 저도 공부해 본 적이 없어서 사제윤리를 찾아보았더니, 가톨릭 신부님들의 목양윤리가 검색이 되네요.

대의를 위해 제자들이 저리 애쓰다 다치는데, 스승된 이가 하던 일을 계속해도 되는 것일까요? 윤리와 도덕을 떠나서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가슴과 머리로 낳아 기른 후속세대라는 점에서, 스승-제자 관계는 부모-자식 관계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자식의 희생에 울부짖고 행동하는 부모에게 윤리 잣대가 무의미하듯, 저희의 이후 행동은 윤리 기준을 넘어서는 천륜이 아닐는지요?

이 지점에서 더 화가 나는 것은 보건복지부 관리자의 발언입니다. “(교수들이) 사직서를 제출하더라도 사직서가 수리되기 전까지는 의료현장을 지키겠다고 분명히 했다.... 학교 당국이나 병원장들도 사직서를 수리하지 않을 것으로 파악된다.”고 했다지요?

저희가 준비하고 있는 사직서 제출이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지난 2월 6일이 한국의료 사망선언일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2천 명 정원을 배분한 3월 20일은 관 뚜껑이 닫힌 날이네요. 흙이 덮이기 전에 마지막으로 스승의 도리를 다하고 싶은데... 어찌해야 할까요? 선언적 의미의 사직서 제출만으로 충분할까요? 생명권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실효성 있는 압박을 가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이 땅의 의사로, 교수로 일하는 저와 교수님이 함께 답해야 할 쉽지 않은 물음이네요.

L 교수님, 저는 물론 교수님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옵고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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