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천의대 예방의학 정재훈 교수

가천의대 정재훈 교수가 위와 같은 제목으로 페이스북에 올린 긴 글이 화제다. 원고지 37매 분량의 이 글에서 정 교수는 ‘의료 붕괴’가 멀지 않았다며 붕괴를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서는 소비자와 공급자와 정부 모두 조금씩 양보하고 희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더 내고 덜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고, 특히 일부 의료행위에 대해서는 자기 부담이 크게 늘어나는 것을 감내해야 한다. 또한 공급자들은 필수의료 제공 기관에 대한 새로운 지불제도를 수용해야 하고, 효과성이 검증되지 않았거나 비용효과성이 낮은 의료를 의료 영역에서 제외하거나 공급량을 줄여야 한다. 정부는 필수의료 제공기관을 ‘음식점’이 아니라 ‘소방서’ 개념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미용이나 성형 등 일부 분야에 대해 특별소비세를 부과하는 등의 방법으로 별도의 재원 마련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이 글은 포스팅 한 시간 만에 100개 이상의 ‘좋아요’와 수십 개의 댓글이 달렸다. 정 교수는 이 글을 올린 이유를 묻자 “금요일(26일)에 열리는 보건행정학회 토론을 준비하던 차에, 파국이 멀지 않았다는 위기감이 들어서 생각나는 대로 썼다”면서, “이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토론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페이스북에 올린 내용을 본지에도 게재하겠다고 하니, “너무 급하게 쓴 글이니 조금 다듬어서 보내드리겠다”면서, 아래의 원고를 보내왔다.

가천의대 정재훈 교수. 
가천의대 정재훈 교수.

매우 오래되고 큰 난제: 의료

보건의료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의료비는 2021년 기준 8.8%를 차지하여, 거칠게 말하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 중 1/10이 보건의료와 관련이 있습니다. 최근 제기되는 필수의료나 공공의료에 대한 문제가 있지만 표면적으로 우리나라는 매우 훌륭한 보건의료체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COVID-19 치명률은 선진국 중 가장 낮은 수준이었고, 기대 수명은 전세계 최상위권이고, 의료에 대한 접근성은 훌륭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입니다.

‘응급실 뺑뺑이 현상’으로 대표되는 응급의료체계의 어려움도 지표로만 보면 계속해서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예방 가능 외상 사망률은 2017년 19.9%에서 2019년 15.7%로 큰 폭으로 감소했으며, 회피가능 사망률도 OECD 국가 중 낮은 편입니다. 하지만 이런 추세가 언제까지 지속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기대는 전형적인 ‘뜨거운 손의 오류(hot hand fallacy)’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보건의료가 높은 성과를 거두어 온 가장 큰 두 가지 이유가 ‘급격한 경제성장’과 ‘생산 가능 인구의 비율이 높은 인구 구조’였다고 평가합니다. 지난 30년간 지속적으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의료적 부양을 할 수 있는 인구의 비율이 유난히 높았기 때문에, 투입되는 의료 재원이 지속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2020년을 기점으로 거시적인 지표는 모두 악화되고 있습니다. 미래 생산 가능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의료비를 가장 많이 지출하는 초고령층의 비율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 등 모든 복지제도가 겪고 있는 동일한 문제이지만, 보건의료도 마치 ‘거대한 폰지’와도 비슷한 구조가 되어 버려, 이대로는 지속 가능성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의료 문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의료보장의 지속성 문제이고 두 번째는 필수의료의 위기입니다. 전자가 훨씬 더 중요하고 필연적 붕괴를 앞두고 있는 문제이지만 문제가 드러나기에는 몇 년의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언론에서 보도되는 안타까운 사례들에서 보듯 삶에 밀접한 주제이므로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저는 필수의료의 위기를 우리 사회가 겪을 거대한 문제의 전조증상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우리나라의 인구문제는 임계점을 넘었고, 파국은 예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파국을 조금이라도 뒤로 미루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안들을 시급히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필수의료의 위기

최근 의료제도와 관련된 여러 토론회와 학회에서 제 의견을 발표하고 토론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의료계 선배의 말은 “내가 이 이야기를 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였습니다.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응급의학과에서 지금 나타나는 현상은 예견된 일입니다.

소아청소년과, 특히 얼마 남지 않은 소아 응급실 등 몇몇 사례로 볼 때, 이미 필수의료 현장은 붕괴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사실 논의 자체가 너무 늦었습니다. 사명감 또는 일에 대한 애정으로 상대적으로 낮은 처우를 버티던 윗세대들은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노동집약적인 의료의 특성으로 인해, 필수의료의 붕괴는 곧 인력부족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는 문제는 그 분야 전체의 현실과 전망의 결과 지표입니다.

필수의료 인력의 부족은 단순히 전체 공급이 부족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왜 인력의 유입이 줄고 유출이 늘어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필수의료에 종사해도 만족할 만한 환경이 조성되지 않으면, 또한 다른 분야와의 상대적 격차가 줄어들지 않으면, 계속해서 인력수급은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대책이 아니라 매우 포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가 필요합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이 문제들이 다 해결되는 마법 같은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의료 위기는 곧 시작됩니다. 저는 지금이 우리나라 의료의 ‘화양연화’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때보다 긴 서론을 지나, 이제 수요자(국민), 공급자(병원, 의사), 관리자(정부)의 측면에서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말해 보겠습니다.

수요자: 더 내고 덜 받는 미래

필수의료에 대한 재정의

모든 정책은 그 대상이 명확하게 정해지는 것이 좋습니다. 국민의 입장에서 가장 필요한 첫 번째 이슈는 ‘필수의료’를 명확히 정의하는 일입니다. 벌써 이 글에 필수의료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했지만, 그 명확한 정의는 놀랍게도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료의 아주 많은 부분이 사람의 생명과 직,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가능한 정의는 ‘국가가 반드시 국민들에게 보장해야 하는 의료서비스’ 정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반드시 보장해야 한다는 개념은 매우 정치철학적이며, 사회적 합의 수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학적 필요와 사회적 가치로 필수의료를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필수의료는 ‘질환의 중증도’, ‘기대 수명에 미치는 영향’, ‘회피가능성’을 기준으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아의 급성 중증 질환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므로 필수의료의 대표적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취자의 응급실 내원은 위 조건을 어느 하나 만족하지 못하므로 필수의료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필수의료인 부분과 아닌 부분의 보장 분리가 필요합니다. 필수의료에 해당되는 분야라면 대부분의 비용을 국가가 보장해주고, 필수의료에서 멀어질수록 본인의 부담과 책임은 늘어나야 합니다. 필수의료에 대한 명확한 정의는 비급여 진료, 실손보험의 본인부담금 무력화 등에 대응할 수 있는 개념적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비필수 영역에 대한 접근성 감소와 본인부담 증가

우리나라는 건강보험 보장률이라는 지표를 지난 20년간 활용해 왔습니다. 이는 매우 간단한 지표로 국민의 지출하는 의료비 중 공공재원이 부담하는 비율이 얼마인지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이 지표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데, 모든 의료행위가 경증, 중증, 필수, 비필수의 구분 없이 하나의 지표로 묶여 버린다는 점입니다.

지난 네 번의 정부는 모두 이 건강보험 보장률을 높이겠다는 정책적 목표를 제시해 왔습니다. 그러나 거창했던 목표와 달리 보장률은 항상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몇 가지 원인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비급여 시장의 급격한 증가, 경증에 대한 과도한 보장으로 대표되는 ‘풍선 효과’에 있었습니다. 여러 진단 검사와 효율성이 떨어지는 항목에 대한 급여 확대가 이어지면서 시장은 급격하게 커졌고, 의료 이용량이 증가하는 바람에 막대한 재원의 투입이 보장률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의료제도는 매우 높은 접근성을 그 장점으로 내세웠지만 높은 접근성은 의료 비용의 증가와 질의 감소로 이어진다는 과학적 논리를 직시해야 합니다. 저는 이제 감기, 통증, 일상적이고 일률적인 진단 검사, 영상 진단 등은 접근성을 줄여야 한다고 봅니다. 응급실에서 과도하게 행해지는 경증 질환에 대한 진료도 이제는 국민의 부담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이는 직접적으로 의료 이용 자체를 줄이고, 방문 환자 당 단가를 높이는 부수적인 효과로 의료의 질 또한 상승시키는 기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접근성 감소를 위한 정책적 수단은 제한적입니다. 본인부담금의 제도적 취지를 무력화시키는 실손 보험의 존재, 이미 높은 접근성에 적응된 개원가 시장은 이런 개편을 더욱 더 어렵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래의 몇 가지 대안을 함께 추진한다면 접근성의 감소는 실현 가능성이 있습니다.

공급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지불제도의 대대적 개편

우리나라의 의료 가격 산정은 행위별 수가제를 기반으로 합니다. 간략히 설명하면 우리나라 병원은 식당에서의 단품 주문과 같이 가격이 책정됩니다. 음료, 봉사료, 김밥 한 줄, 라면 한 그릇 모두 가격이 책정되어 있고, 그에 따라 지불이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식당에 내원하는 손님이 감소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소아과의 현실처럼 잠재적 소비자가 1/3, 1/4로 감소한다면 단가를 3배, 4배로 올려도 현상유지 정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불제도의 개편은 필수의료에서는 불가피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제 필수의료는 1차, 2차, 3차, 응급실 모두 식당 방식이 아니라 소방서 방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필수의료를 국민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로 정의한다면 이는 사전에 보상되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는 그 지역의 소아환자, 외상환자, 심근경색환자를 감당해주는 대가로 정부와 건강보험공단은 그 단위 기관의 운영비 전체를 보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런 변화가 달갑지 않은 기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소한 이런 변화를 수용하는 공급자라도 새로운 지불제도 패키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옵션을 주어야 합니다.

의료 행위에 대한 재정의

우리 의료계도 앞으로 나아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의료행위의 과학적 효과성과 비용효과에 대한 전면적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의료계가 국민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 중 의학적으로 그 효과성이 불투명한 항목, 그리고 가치에 비해 과도하게 높은 비용을 요구하는 것들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정리해 나가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일부 수액 치료, 한약 치료 등은 과학적 효과성에 대한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됩니다. 또한 반복적 통증 관리, 일부 진단 검사 등도 과학적 비용효과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영역들입니다. 이런 부분은 의료계 내부에서도 평가하고 의료 행위에서 제외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만약 효과성이 없거나 비용효과가 매우 낮은 영역을 의학적 행위에서 분리할 수 있다면, 이는 건강보험 재정 위기, 실손보험의 본인부담금 무력화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기술의 도입: 비용의 증가나 누구만의 이익이 아닌

계속해서 의학은 발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공지능, 분자생물학, 유전체학의 발전은 매우 눈부십니다. 그러나 그 기술의 발전은 비용 절감의 관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기술이 매우 낮은 비용효과를 가지고 있을 때, 이는 모두에게 이익이 되기보다 그 기술에 대한 접근성에 따라 불평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대면 진료 등의 새로운 플랫폼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의 발전이 아닌 규제의 회피나 중계를 통해 이루이지는 수익은 보건의료제도의 지속성 관점에서 제한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높아지는 접근성, 낮아지는 규제, 늘어나는 비용은 필수의료 붕괴를 오히려 촉진하고 보건의료의 지속성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즉 새로운 기술은 의료의 질이나 접근성의 관점보다 비용절감의 관점을 더욱 더 강조해야 합니다.

관리자: 모두에게 손가락질 받을 용기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

월급 명세서를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건강보험료율은 매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제 건강보험은 내 월급의 7%를 가져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 비율은 계속 증가할 것입니다. 하지만 건강보험료율이 지금처럼 꾸준히 증가해도, 5~10년이 지나면 건강보험 재정은 큰 폭의 적자가 예상됩니다. 국민들에게 보건의료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기 위해서는 건강보험료율은 더 빠른 속도로 인상되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잘못은 아닙니다. 단지 우리나라 인구 구조가 현재 및 미래의 생산가능 인구세대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별도의 재원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저는 그 대안으로 특별소비세를 일부 의료 영역에 적용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특히 미용이나 성형 등의 일부 영역에 대해서 특별소비세를 징수하고 이를 필수의료를 위한 재원으로 활용하면 명분과 성과 모두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의료의 일부 영역은 인력 육성과 관리, 인프라는 공적 재원을 이용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공적 영역에 대한 기여는 소득에 대한 세금 말고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영역에 적절한 과세가 가능하다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양출제입에서 양입제출로의 변화

‘양출제입’은 지출을 먼저 결정한 후 수입 계획을 세운다는 의미입니다. 올해 건강보험에서 나가는 지출에 맞추어 정부재원을 추가하고 보험재정을 충당하는 형태였습니다. 이는 확장적 재정이나 성장 가능성이 높은 시기에는 국민의 의료 접근성과 의료의 질 모두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건강보험 재정의 지출원칙은 ‘양입제출’이 되어야 합니다. 매년 건강보험료율을 인상하여 국민의 부담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지출에 맞추어 추가적 재원을 조달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이제 국가 전체의 의료비 지출과 수가 결정에는 다음해 얼마의 재원이 걷힐지에 대한 예상이 반영되어야 합니다.

이 또한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의 극심한 반발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건강보험 재정은 이런 방법이 아니면 지속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국민도, 의료계도 이해해야 합니다.

다투지 말고 함께 고민해보자

우리 사회는 지난 수 십 년의 발전의 시기를 지나 조금 어렵고 힘든 날들이 예견되고 있습니다. 이미 현실로 다가온 필수의료 인력 부족은 그 시작입니다. 제가 오늘 꺼낸 이야기들은 누구를 탓하거나 정치적 이념적 논쟁을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과거들은 지난 모든 민주 정부들에서 동일하게 추진된 정책이었고, 많은 국민들이 동의한 방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건조하게, 우리 공동체를 조금이라도 더 유지하기 위해 함께 고민해볼 시간입니다.

앞으로 우리 국민들은 예전처럼 병원에 쉽게 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일부 공급자는 수입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조금씩만 양보한다면 파국의 시간은 조금 더 미뤄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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