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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인 것을 느끼자 드세고 고집불통인 그가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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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인 것을 느끼자 드세고 고집불통인 그가 그리웠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2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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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다시 잠과 같은 고요가 찾아왔다. 이게 가능한 일인지 여순은 알다가도 모를 일에 모든 것을 맡겨 버렸다. 금방이라도 절멸할 것 같은 기세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푹 꺾여 버렸다. 지옥과 천국은 따로 있지 않고 늘 같이다녔다.

그래, 세상은 시끄러움만 있는 건 아냐. 이것봐. 이렇게 조용하잖아. 늦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부모님과 식구들은 모두 일터에 나가고 혼자 남은 방안에서 이게 무슨일이지? 세상은 왜 멈춰있지? 하는 유년의 기억 한자락이 올라왔다. 그래, 그때와 같은 침묵이 지금 왔어. 

기세좋게 쏟아지던 총소리의 연주가 멈추자 하늘의 구름도 사라졌다. 숨어있던 해는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순식간에 대기는 용광로 속처럼 다시 절절 끓어 올랐다. 좋은 게 아니구나. 더워. 너무 덥다고. 여순의 말은 사실이었다.

몸의 열기는 온도로 증명되고 있었다. 기온은 급상승하고 있었다. 축축하던 것이 일시에 말라버렸다. 이곳의 날씨는 전쟁을 닮았다. 축축한 것도 예고 없이 왔고 마른 것도 그랬다. 전쟁과 날씨. 천국과 지옥. 반대되는 개념은 이렇게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화창한 대기는 눈을 시리게 했다. 시력만 좋으면 지구끝까지 보일 기세였다. 저 끝에는 고향 죽마을이 있을까. 눈에 망원경을 달면 죽마을이 보일 것만 같은 먼지 하나 없는 그런 푸르른 날이었다. 사이판의 날씨 중 오늘이 가장 좋은 날인가. 아니면 어제가 더 좋았을까. 알겠지. 한 달 정도 지내보면. 오늘 날씨가 어떤지.

이제  바람까지 불고 있다. 너무 세지도 너무 약하지도 않고 적당하다. 전쟁도 이처럼 적당했으면 좋겠다. 적당히 끝내자. 여기서 끝내면 좋겠네. 그래 날씨도 좋은데 좋은게 좋은 거 아냐. 여순은 마구 생각나는대로 의식을 따라갔다. 

시작했으면 맺는 것도 있어야지. 그것이 꼭 확실할 필요는 없어도 대충이라는 게 있잖아. 대충 그래 대충 마무리 짓자고. 그내야 나도 살고 너도 살지. 너무 길게 늘어지지는 말자.  지금까지 늘어진 것만 해도 충분해. 그러니 이제 다 왔어. 그래야지. 좀 쉬자. 나도 쉬고 그래, 나무 그늘에는 개들이 배를 드러내고 누워있구나. 저곳이라면 쉬어도 좋을 만한 장소다.

검은 개가 하얀 배를 드러내고 여유를 부리자 여순은 말수는 안녕한지 걱정이 됐다. 말수는 산에서 내려올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갔을까. 여순은 갑자기 자신을 말리는 말수를 마다하고 마을로 내려온 것은 잘한 것일까, 아니면 잘못된 선택일까. 양쪽을 놓고 저울질했다.

어쨌든 지금까지는 성공이야. 어제 저녁에 산에서 엄청난 폭발이 쏟아졌어. 말수는 죽었을까. 죽음까지 그와 함께 했어야 했나. 여순은 갑자기 혼자된 느낌이 들었다. 이 낯선 곳에서 그야말로 이국만리에서 혼자라니. 그러나 이보다 더 자유를 느껴본 적은 없어. 언제나 늘 누군가를 의식했어. 지금은 아냐. 나는 혼자이면서 자유야. 여순은 혼자가 주는 고독과 혼자가 주는 자유의 양면성을 느꼈다. 이런 감정도 전쟁과 비슷한가. 

자신을 이런식으로 추스르면 여순은 나갔던 정신이 온전히 들어왔음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말수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었다. 잘 있을거야. 언제나 생존본능이 뛰어난 사람이니. 그도 나처럼 나의 생사가 궁금할까. 그랬으면 좋겠다. 여순은 한 번도 정말이지 단 한번도 말수에게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단지 고맙거나 의지하거나 하는 것이었지 그리움이랄까 아니면 걱정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거칠고 드세고 고집불통인 그의 안전이 두렵다. 살아 있을거야. 먹을 것도 챙겼을 거고. 걱정할 것 없어. 하지만 그럴수록 말수를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으로 갈까. 지금 당장. 그는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때로는 채로 까불어서 내쫓아야 할 사람이었다. 여순에 대한 온정은 자신을 위한 측면이 있다. 혼자보다 둘이 좋은. 앞서갔나. 지금은 그걸 잴 때가 아냐. 귀에서 욍욍거리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고요는 지속됐다. 그러니 더 이상한데. 너무 조용해. 전쟁터에서 조용한 것이 말이돼. 감정의 기복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여순은 좋았다가 나빴다가 차분해졌다가 심해졌다가 자꾸만 중심을 잡지 못했다. 

어쩌면 죽는 게 좋았을지 몰라. 지금은 몸이 쪼그라들고 있어. 말수가 옆에 있다면 이 정도는 아닐텐데. 여순은 혼자인 자유보다 혼자인 고독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 완전히 혼자일때는 자유는 필요없다. 그래 나에게 자유는 과분한 거야. 남양군도에 처음으로 끌려올 때 말수를 만나기 전까지 겪었던 온갖 수모와 모욕. 그래, 말수는 내 생명 다 줘도 아깝지 않은 부몬 같은 존재야. 그런데. 그 생명의 은인을 버리고 내가, 왜 나는 그의 만류를 뿌리쳤을까. 그러고 보니 말수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막지 않았다. 그게 무섭게 노려보거나 호통을 치거나 막았더라면 혼자서 마을로 내려올 수 없었다. 왜 일까. 내가 거추장스러웠을까. 생존에 내가 위험이 된다고 느꼈을까. 혼자가 둘보다 더 안전해서일까. 여순은 자신이 처음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뱃멀미와 막사의 고립된 생활. 그가 하자는대로 할걸 그랬어. 뒤늦은 후회가 여순을 압박했다. 

여순은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 이런 때는 신을 찾아야 한다. 무언가 절대적인 것,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필요했다. 막사의 음침한 구석에서 자신을 구해준 말수를 배신한 행위에 신의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가 용서해 주면 다 끝난것 아닌가. 그러나 여순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냐, 신은 용서를 할 수 없어. 사람인 내가 직접 해야지. 말수는 신따윈 믿지 않아.  나도 그래. 신이 있다면 이런 상황이 가능할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썩어가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신이 없든 있든 기도하면 마음이 편해져. 그래 말수를 위해 그 누군가에게 기도하자. 생명을 향한 그의 처절한 노력, 살아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놀라운 정신력에 힘을 보태자. 아직 우리의 삶은 끝나지 않았어. 난 이제 겨우 스물 셋이야. 스물 셋이라고. 말수는 자기 나이를 말하지 않았어. 그러나 나보다는 많겠지. 두 살, 아니면 세 살. 그 보다 더 많을까. 나중에 만나면 물어봐야지. 꼭 물어볼 거야. 

밤새 나 걱정은 안했느냐고. 사악한 인간. 아무때나 욕하고 자신보다 지위가 낮으면 깔보는 자가 그런 걱정을 했을라고. 아냐 하고도 남을 거야. 지금쯤 몹시 후회하고 있겠지. 나를 찾아 벌써 마을을 헤매고 있는지도 몰라. 성당의 구석까지 훑으면서 여순을 목놓아 부르겠지. 아냐, 불렀다면 내가 그 소리를 듣지 못했을리 없어. 안 들려. 나를 찾는 목소리가. 그는 용감했어. 군함의 갑판에서 정말로 의사정신을 발휘했지. 정말 환자를 치료할 때는 의사보다 더 의사답지 않았나. 부인할 수 없어. 함장도 말수를 신뢰했지. 일부러 그랬다고 해도 그 신뢰는 스스가 한 행동에 대한 보답의 결과였어. 그 때문에 나도 죽을뻔 했지만 말이야. 

다시 종소리가 들렸다. 여순은 스스로 감기는 눈꺼풀을 어쩌지 못했다. 어쩌라고 잠은 이렇게도 계속 오는가. 배는 고파도 잠은 잔다. 총소리가 들려도 그렇고 굶주린 개가 다가와 킁킁 거리며 냄새를 맡아도 잠은 온다. 그래 자자, 남는 건 잠 밖에 더 있더냐. 여순은 억지로 깨지 않고 그냥 그대로 오는 잠에 몸을 맡겼다. 

종소리. 이번에는 깊은 숲속 무량사의 절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키가 작고 다부진 스님이 위에서 내려온 두 줄을 한 손에 하나씩 잡고 있다. 종과 정면에 서지 않고 옆으로 비켜서서 줄을 뒤로 잡아당겼다가 어느 순간 힘을 주어 앞으로 밀었다. 끊어졌던 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크게 울리면서 서서히 사라지는 종소리는 한동안 이어졌다. 여순은 그 소리를 들었고 또 들었다. 

수평으로 선 아름드리 통나무가 앞으로 나가 부드러운 용의 몸통을 가볍게 쳐냈다. 그것은 성당의 종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처음엔 크고 강했으나 나중에는 여리게 여운을 남겼다. 연달아 땡땡땡 치지 않고 기다렸다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소리가 다 죽었다 싶으면 다시 스님은 두 손을 이용해 나무를 뒤로 밀었다 앞으로 당겼다. 그 의식은 마치 장례를 집전하는 신부처럼 엄숙했다.

하나의 의식은 이처럼 소중했다. 이 상태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 절마당에 앉아 들려오는 아늑한 종소리를 들을 때처럼 편안한 정신을 유지하고 싶다. 그 때 몸은 또 얼마나 안정적이었던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는데도 환하게 피어났던 웃음의 의미를 여순은 꿈속에서나마 조금은 이해했다.

종소리가 끝나면 여순은 절 마당을 뛰었다. 스님의 빗자루를 피해 삼층석탑 주위를 돌기도 했고 대웅전을 건넜다가 다시 탑 앞에 서기도 했다. 사람들처럼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흉내를 냈다. 그 곳에 엄마가 있었다. 엄마, 그래 그 모습은 엄마였다. 엄마는 간혹 절을 찾았다. 보자기에 쌀 한 됫박을 담아서, 어떤 날은 초를 세 개 사서 엄마는 여순의 손을 잡고 절에 가자고 재촉했다.

오늘은 절에 가는 날이라고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성당에 갔다가 절에 갔다가 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엄마는 개의치 않았다. 어디든 상관없어요. 오늘은 절에 내일은 성당에 간다고 신이 벌을 주겠어요. 신은 사랑이라고 했어요. 사랑하는 신이 자신말고 다른 신을 찾았다고 시기하겠어요? 아니지요. 

그것은 아버지가 아닌 여순에게 하는 소리였다. 너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엄마는 환하게 웃었다. 아버지는 그런 엄마가 못마땅했으나 듣고 보니 그럴듯 했고 틀린 말도 아니어서 오늘은 절에 간다는 말에도 가만히 있었다. 여순은 엄마를 따라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갔다. 엄마를 따라다닐 때 여순은 행복했고 즐거웠다. 예쁘게 차려 입고 엄마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절에도 가고 성당에도 갔다.  그러나 엄마는 절에서는 성당이야기를 성당에서는 절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그런 엄마를 여순은 이해했다.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다. 누가 손을 내밀면 거절하지 않았다. 거기도 좋고 여기도 좋았다. 집보다 넓고 뛰어다닐 수 있고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었다. 생김새가 다르고 하는 말이 다르고 다른 표정의 얼굴을 구경하면 기분이 좋았다. 여순은 지금, 절과 성당의 중간쯤에 서 있었다. 감정의 동요를 가라앉히는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하나의 소리였을 뿐인데 종소리 하나로 여순은 기분전환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기분은 보기좋게 깨졌다. 종소리가 비명소리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유리창 깨지는 소리. 그것은 건물의 잔해 속에서 들려왔다. 소리나는 쪽에서는 무언가가 비어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손이었다. 사람의 손.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여러개가 동시에 손을 뻗었다. 돌무기를 헤치면서 동시에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여순은 일어섰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는 일어나서 발을 옮겼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잡아달라고 내민 손을 잡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래로 처진 다른 손은 곧 차갑게 식기 시작했다. 시계를 찬 손목이 꺾인 손도 마찬가지였다. 손에서 여순은 삶과 죽음을 파악했다. 서 있는 손은 살아 있었고 아래로 떨어진 손은 죽어 있었다. 어떤 손은 팔뚝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혼자 떨어져 있기도 했다.

여순은 이럴수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의식의 끈을 놓았기 위해 손등을 꼬집었다. 일부러 그렇게 했다. 버텨보려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 보려고 했다. 이대로 고꾸라 질수는 없다. 따뜻한 손의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 그는 닥치는대로 쌓인 벽돌을 치우고 또 치웠다. 손에서 팔뚝이 드러나고 어깨가 드러났다. 그런데 얼굴이 없다. 얼굴이 사라졌다. 얼굴없는 몸을 여순은 이곳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막사에서 군함의 갑판에서 숱한 환자를 봤지만 이런 환자는 처음이었다. 

간신히 잡았던 여순의 의식은 저쪽으로 얼굴없는 몸통으로 옮겨갔다. 그러다가 다시 이쪽으로 왔다. 정신력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잠깐의 잠은 그를 용기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잠깐 나갔던 흐리멍덩한 정신은 가고 또렷한 정신이 서서히 실체를 드러냈다.

오랜만에 보는 접골 아주머니였다. 작두위에 있던 그녀가 여순 앞에 나타났다. 아주머니는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 여순아, 사탕가져왔다고 손을 내밀었다. 늘 듣던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아주머니는 아버지의 먼 친척이었다. 주변에서 용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정식 신내림을 받지 않았으나 그런 사람보다 낫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여순이 아프거나 집안에 우환이 들면 아주머니를 초대했다. 먼저 쌀 한 됫박을 가져가서 청하고 굿이 끝나면 얼마간 더 챙겨주었다. 그러면 그것에서 일부를 아주머니는 떼서 여순에게 무엇이든 사 먹으라고 용돈으로 주었다. 지금 그 아주머니가 여순 앞에서 웃고 있다. 시퍼런 작두 위에 올라서서 손을 내밀고 있다. 나 잡아봐라. 아주머니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 웃음 뒤로 초가집이 보였다.

작은 마당이 있고 외양간에서 소가 울었다. 울음 소리에 맞춰 아주머니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날선 작두 위에서 걸음을 걸었다. 걸으면서 머리를 빙빙돌렸다. 커다란 모자에 달린 방울이 울기 시작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아주머니가 덩실덩실 춤을 출 때는 더 큰 소리가 났다. 손에 든 채에도 방울이 있어 위아래서 울리는 땡그렁 거리는 소리가 작은 방을 가득 채웠다.

땀과 방울 소리, 무언가 내지르는 소리가 오늘은 왠지 낯설었다.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나 여순은 꾹 참았다. 이것이 지나가야 용돈이 생겼다. 그런데 오늘 접골 아주머니는 그전과는 달랐다. 여순에게 우리 여순대신 저년 썩 나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네가 여기에 있을 곳이 못 된다고 했다. 귀신은 귀신끼리 살라고 호통을 쳤다. 평생 안 하던 욕을 듣자 여순은 파랗게 질렸다. 서운함과 배신감이 몰려왔다. 엄마는 그런 여순을 감싸 안았다.

울음이 터졌다. 무섭기도 했고 평소 믿었던 아주머니가 변심한 것에 대한 실망에 여순은 더 크게 울어 제겼다. 우리 여순은 어디 가고 저년이 있단 말인가. 아주머니는 아랑곳 않고 정말 미친년처럼 입에 거품을 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여순은 방울 소리가 요란해질수록 욕 소리도 높아가는 것에 더는 참을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밖은 더 무서웠다. 깜깜한 대지는 아무것도 식별할 수 없었다. 그믐날도 이러지는 않았다. 그녀는 신발을 찾는 것도 대문 앞으로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녀는 돌아섰다. 다시 굿이 열리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잡은 문고리는 열리지 않았다. 얼마나 세게 닫았는지 아무리 흔들어도 꿈쩍하지 않았다. 여순은 그대로 토방에 쓰러졌다.

그 위로 돌무더기의 팔이 따라왔다. 팔은 돌을 헤치고 나와 쓰러진 여순을 흔들어 깨웠다. 여기 누워 있으면 죽어. 어서 일어나서 달려가. 달려가라고 . 그래야 죽지 않고 살아. 여순이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나기 보다는 누운 채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하늘에 무수히 많이 별들이 낮은 곳에 걸려 있었다. 여순은 그 날, 이처럼 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려올 때 아주머니를 배웅했다.

인사해야지, 여순아. 엄마의 말씀을 거절할 수 없었던 여순은 내키지 않은 듯이 작은 소리로  안녕히 가세요, 아주머니 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주머니는 여순에게 다가가 이걸로 과자 사 먹어, 우리 예쁜 여순아 하고 전과 똑같이 부드러운 미소를 안겼다. 

여순은 그런 아주머니가 보고 싶었다. 왜 굿 중에서 나쁜년이라고 자신에게 욕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런 물음은 그 전에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머니, 욕을 해도 좋고 매로 때려도 좋아요. 나를 여기서 빼주세요. 죽마을로 데려가 주세요. 엄마가 지켜보고 있으니 굿을 해주세요. 그것도 큰 굿을요. 작두는 갈아오세요. 시뻐렇게 아주 시뻐렇게 날이 선 작두를 타주세요. 용돈은 필요없어요. 이곳에서는 쓸 수 가 없어요. 그러니 주지 않아도 되요. 

더는 이 꼴을 보기 싫고 붕대도 소독약도 항생제나 주사도 지긋지긋해요. 그러니 제발 아주머니. 날 어떻게 해줘요. 난 자야해요. 여러날 잠을 못잤어요. 나는 잠이 좋아요. 하루 열 시간 이상 자야 해요. 그래야 살아 있는 나를 볼 수 있다고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어제는 겨우 한 두 시간을 잤을까요. 그것도 자가 깨다 했어요. 이것도 잠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난 자고 싶어요. 

아주머니의 방울 소리가 듣고 싶다. 그 소리라면 뭐든지 잊을 수 있다. 그러자 정말 종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종소리는 몇 번 울이다 말고 곧 그쳤다. 그 자리에 폭발음과 따발총 소리와 인간이 지르는 비명으로 바뀌었다. 마지막으로 들여온 인간의 소리는 성당의 잔해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문밖에서 나는 소리였고 부서진 탱크 안에서 울부짖는 소리였다.

그중에서 성당의 돌무더기 속에서 지르던 소리가 가장 크고 날카로웠다.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손과 함께 손이 붙어있던 몸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온 손은 이쪽으로 오라고 네가 올 것은 이곳이라고 까불면서 신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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