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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4-19 07:46 (금)
아직 자신은 덜 여문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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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자신은 덜 여문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3.03.24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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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례와 헤어진 조선 청년은 한동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을 만큼 그녀에 빠져들었다. 남자가 휘청일 만큼 빼어난 미모 때문은 아니었다. 그녀가 그에게 다정한 호감을 보여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도 그녀에게 남자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나 마음의 깊은 구석에 그녀가 오래도록 자리잡을 것을 예감했던 것이다. 외모나 성적 매력 외의 것이 그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비싼 옷차림에 끌린 것도 아니었다. 갖춰 입지 않아도 그녀는 차려입은 사람보다 더 정숙함을 느꼈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인간의 자격 같은 것이 점례를 싸고돌았다. 마치 이른 아침 강가의 물안개처럼 말이다. 단정하면서도 품위가 있었다. 만주에 온 지 삼 년 만에 청년은 따뜻한 그 무엇이 자신에게 한 발 다가온 것을 알았다.

온기가 넘치는 국밥 같은 그녀 얼굴이 시도때도 없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말랐다 싶은 만큼 작은 체구에 조용히 다문 입술에서 떠올랐던 작은 미소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여러 시간을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사실이 잠결에 서 보는 꿈결처럼 아득했다. 비현실적인 것이 하루 만에 일어난 것이다.

청년은 지금까지 보았던 모든 여자는 잊었다. 오직 그녀만이 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청년에게 치명적인 실수였다. 공작원에게 이성은 금기였고 그것 때문에 일을 도모하기 전에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스승은 늘 그것을 지적했다. 조선의 독립만을 생각하고 그것은 나중에 하라도 경계했다.

그러나 사람 일이라는 것이 경험이 많은 공작원이라고 해도 그리 말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이것은 명령과는 다른 것이었다. 지키지 않아도 알 수 없는 지휘체계 밖의 일이었다. 조선청년에게 하루는 우연과 필연과 운명이 겹쳐져서 돌아가고 있었다. 그녀가 기차에 탄 것도 기차에서 자신을 도왔던 것도 모두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끌려온 것이다.

청년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녀를 향해 그러지 말아야지 했다가도 그래도 괜찮아, 하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마음 때문에 그는 정신이 빙빙 돌아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인생의 주인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래도 이것은 자신이 혼자 결정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권총으로 누군가는 쏘고, 쏘지 않아야 하는 상황과는 달랐다. 청년은 거룩하게도 조선독립의 과정을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꿈을 꾸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그녀가 끼어들어 어떤 의미로 남기를 바랐다. 그러나 떠난 그녀가 다시 자신 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풀거나 매듭짓는 일이 모두 나아닌 그녀 몫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없었다. 그의 일상은 이제 완전히 그녀에게 사로잡혔다. 모든 사람을 제대로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점례만큼은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고 싶었다.

철저하게 만주에서 이방인이었던 청년은 이곳이 이제 고향 같이 아늑했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이방인으로 쫓기면서 살았을지도 몰랐다. 그는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고쳐주고 더해주기로 작정했다. 어딘지 모를 신비로움에 숨겨진 비범한 능력을 밖으로 끄집어내 세상에 유용하게 써야 하는데 그 역할에 자신이 적임자로 여겼다. 

무슨 일로 여기에 왔을까. 그림 공부 때문이라고 했지만 어딘지 석연치 않았다. 스케치나 물감은 신분 위장용이 아닐까. 물론 스케치 수준은 화가라고 해도 믿을 만 했으나 의심 살 만한 이유를 대자면 못 댈 것도 없었다. 더구나 만주에서 화가 수업은 어울리지 않았다. 조선에서도 얼마든지 화단에서 이름을 날 릴 수 있었다.

일정한 자격을 갖춘 동지가 있다면 그녀에게도 어울릴 것이다.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그녀를 애인이 아닌 동지로 받아들였다. 그도 나와 같은 길을 가고 있을까. 나의 스승말고 그의 스승이 따로 있을까. 아니면 그 자신이 스승이 되어 독자적으로 무엇을 꾸미고 있을까. 

청년은 길게 한 숨을 쉬웠다. 이 한 숨 조차도 그녀 없이는 불가능했기에 그녀는 고마운 나의 그 무엇이었다. 그는 갚아야 할 빚을 지고 있다.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기꺼이 도와준 용기를 어떻게 무슨 수로 갚아야 하나.

하룻 밤 자신의 집을 내준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나 같으면 그 순간에 어땠을까, 청년은 확답을 내릴 수 없었다. 위기의 순간에 몰리면 인간은 남보다는 먼저 자신의 안위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점례는 태연하게 자신을 위험에 빠트렸고 나는 보기 좋게 벗어났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조선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됐을 지도 모른다. 아니 십중팔구는 그렇게 됐고 지금 살아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조직의 비밀을 털어놓는 장면에 이르자 조선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문의 아픔과 충격을 견디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조직의 선생이 체포되고 만주 지역 항일 조선인 단체가 와해 되는 것을 염려한 때문이었다.

나 하나 때문에 어렵게 일군 일이 무너지는 일은 비참한 것이다.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지 뭐야.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기차를 조사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날의 검문이 반드시 정보를 사전에 안 일경이 항일 단체를 체포하기 위해 들이닥친 것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의 일경 태도는 어딘지 모르게 달랐다. 쫓고 있는 용의자가 탑승했다는 확실한 첩보를 입수하고 반드시 체포하겠다는 의지를 보았던 것이다. 누군가. 정보를 준자가. 조직 내에 밀정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조선 청년은 알지 못해 답답했다. 그날 이후 여러 날이 지났으나 그는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다. 누가 밀정인지 알아내지 못하면 언제든지 위험한 상황은 닥치기 마련이다. 지금 이순간도 밀정이 따라붙고 있는지 모른다. 뒷덜미가 서늘한 것은 그 때문인가.

선생에게 보고할 것도 뒤로 미뤘다. 감시자를 따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시내의 번잡한 곳에 모인 것은 이러한 이유였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은 허점도 많기 때문이다. 

장소를 여러 번 바꾼 끝에 조선 청년은 조직 상부자를 만나 다음을 기약하기 위한 접선을 시도했다. 중국 음식점에서 그들은 중국인이나 일본인 흉내를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선말을 쓰지도 않고 그저 손가락으로 음식을 가르켰다.

주인장에게 어디 나라 사람인지 굳이 알릴 필요가 없었고 혹 음식점 내에 숨겨둔 첩자가 있다면 그에게 의심을 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탄로 난 것이다. 이번에도 조선청년의 일정이 노출됐다. 한 번도 아니고 연달아 두 번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그는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원망할 일이 없겠다.

기차에서 음식점에서 자신의 동선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도대체 누구인가. 누가 내 뒤를 따라 다니면서 일제에 보고하는가. 그러나 운명의 신은 이번에도 조선청년 편을 들었다.

일본군도 허술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혼자서 들이닥친 것을 보면 그들도 우연히 검문을 하다가 낌새를 챘거나 아니면 그냥 생각 없이 아무나 잡아가려고 했는지도 몰랐다. 그도 아니라면 혼자만의 공으로 특진을 노린 어설픈 소영웅주의자의 행동이었는지도. 

진실을 알고 있는 자는 현장을 덮쳤던 휴의가 유일했다. 만주군 소위 휴의는 사복으로 갈아 입고 만주 시내를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었다. 부대장이 준 공작금은 유용했다. 짜장면 한 그릇으로 작은 위세를 보이려던 찰라 그는 커다란 떡밥을 물었다.

직감적으로 그는 자신의 맞은편에서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하는 수상한 자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아무말 없다고 했으나 실은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해도 그들끼리는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불신검문이 필요했고 충분히 두 명 중 한 명은 제압 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아직 그는 그런 내막을 부대장에게만 보고했다. 그 역시 조직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다. 휴의는 부대장과 직접 면대면으로 보고했고 보고한 내용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갔다. 나중에 권총을 썼으나 그들은 총알까지 피하면서 시야에서 사라졌다. 휴의는 땅을 쳤다. 

그는 부대로 돌아와 침묵했고 의심많은 부대장은 그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가 보고해올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그만큼 예외적으로 휴의를 신뢰했다. 사상적으로도 인간적인 면에 있어서도 부대장은 휴의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휴의도 그런 부대장에게 화답했다.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휴의는 죽을수도 있다는 감정이 이런 것인가 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런 감정이 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표했다. 자신보다 출신 성분도 뛰어나고 일본 육사까지 졸업한 고급 장교가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것이었다. 

실망시키지 말아야한다는 각오는 휴의를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휴의는 스스로도 몰라보게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변화가 무엇이든 변화를 이겨 낼 수 있는 힘이 있었고 능동적으로 거기에 참여했다. 그것이 휴의가 가진 장점이었다. 

아직 덜 여문 열매였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런 때는 부대장을 찾아 조언을 구했고 언제나 만족한 답을 들고 돌아섰다. 틈나면 몸을 단련했고 전술을 익혔고 무엇보다 위험에서 물러나지 않는 대범함을 키웠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부대의 역사에도 관심을 가졌다. 만주가 일본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형인지도 깨달았고 그래서 이곳을 지키기 위해 상사에게는 전투경험을 물었고 적의 도주로를 사전에 차단하는 기술을 배웠다.

부대장은 아낌없는 지원으로 그를 밀어주었다. 대원들 앞에서 은근히 칭찬하거나 그가 내놓은 작전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하는 것으로 위상을 높여줬다. 휴의는 그때마다 모든 것은 부대장님의 지시에 따른 결과일뿐이라고 겸손해 했다. 숙소로 돌아와서는 밤늦게 까지 독립군을 어떤 식으로 최단 시간내에 잡아들일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단독 검거 작전의 실패 이후로 휴의는 부대장이 붙여준 참모를 그림자처럼 데리고 다녔다. 그는 늘 그와 함께 했으나 그의 깊은 생각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알아도 상관없는 것만 이야기 했고 정작 중요한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를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믿는 것이 확실한 것인지 알때까지는 숨겨두는 버릇 때문이었다. 그는 늘 물었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부대장이 언젠가 말했던 훈춘 사건 같은 큰 사건을 만들어 독립군 조직을 일망타진하면 어떤가 하고 자문했다. 휴의는 그것을 참모에게 묻지 않고는 답은 그렇다로 결론을 내렸다.

휴의는 자다말고 벌떡 일어나 몇가지를 적었다. 이번에는 이쪽의 피해를 굳이 만들어 낼 생각은 없었다. 손해를 과장하고 보복공격하는 것은 낡은 수법이었다. 과거에서 기회를 얻었지만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을 새로 추가한 것이다. 

적을 매수하거나 사건을 조작하는 대신 새로운 작전을 짜기로 했다. 그것은 공포를 조성하는 일이었다. 순전히 이는 그의 경험에서 오는 감이었고 공포 만큼 대중의 속내를 끌어내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공포 앞에 서본  사람의 마음은 이곳 만주에서도 통할 것이다.

죽마을의 일본 순사 하인이었던 완용이 순사와 함께 마을 순찰을 돌 때를 떠올렸다. 순사는 언제나 말을 타고 왔다. 깔끔한 복장에 긴 가죽 장화를 신었고 칼을 차고 권총을 품속에 품고는 왕의 행차처럼 비켜서라 소리를 지르면서 멀리서부터 자신의 존재를 부각했다.

길가던 흰옷 입은 사람들은 시키는 대로 한쪽으로 공손히 비켜섰고 일부는 아예 바닥에 엎드리기도 했다. 그런 사람 가운데 아무나 채찍으로 때리면서 조센징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고 순사는 조선사람 다루는 방식을 몸소 시범보였다.

그러면 맞지 않은 조선인은 자신도 곧 맞을지 모른다는 우려움 때문에 더 바짝 엎드렸고 맞지 않기 위해서는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복종심이 더 강하게 몰려왔다.

휴의도 그런 경험을 숱하게 했고 거기서 받은 공포심이야 말로 인간의 내면에 숨은 두려움을 극대화 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아무나 잡어서 족치기로 했다. 여기 있는 사람은 중국인이든 조선인이든 지나가는 길잃은 개처럼 취급했다.

마구 치다보면 어떤 실마리를 찾을지도 모른다. 작은 실마리가 큰 해결책이 되는 경우를 많이 봐 오지 않았던가. 그래, 오늘은 놓쳤지만 내일은 잡는다. 도망간 독립군을 반드시 색출해 부대장의 체면을 살려주고 믿음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었다. 휴의는 자신을 따돌리고 도망한 자에 대한 적개심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생각한 것을 꾸물 거리지 않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단독으로 치고 들어갔다가 놓친 음식점이 첫 번째 목적지였다. 분풀이를 하고 싶었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 흘릴 휴의가 아니었다. 맞은 곳에서 두 배로 갚아줘야 다시는 그런 자들이 발을 붙이지 못한다. 휴의는 이번에는 홀로가지 않고 부대장이 붙여준 부하를 데리고 갔다. 두명 이면 괜찮아. 크게 눈에 띄지 않고. 

휴의는 중국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보다는 복장으로 그것을 대신했다. 번쩍이는 군복이 아니라 양복으로 제대로 빼입었다. 부대장이 먹고 마음대로 쓰라고 준 돈으로 옷을 장만한 그는 점잖은 사업가 흉내를 내면서 음식점을 휘둘러봤다. 마치 공장을 시찰하는 사장처럼 눈에 걸리는 사람들이 다 자신의 부하들이었다. 

거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태도에 주인장은 스스로 자신을 낮췄다.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다는 억지 웃음을 지었다. 휴의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는 것은 자신의 공포심 유발이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다시 일깨워줬다.  그는 음식을 시키고 술을 약간 먹었다. 그는 아무말없이 배를 채운 다음 다시 주인장을 불렀다. 음식을 칭찬한 그는 값에 비해 넉넉하게 돈을 지불했다.

주인장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함을 표하자 휴의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가족 관계를 물었다. 그리고는 알고 싶은 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말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돈을 주지 않아도 고맙다고 할 판인데 더하기 까지 했으니 주인장의 황공함은 말할 수 없었다. 죄지은 자처럼 공손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럼에도 휴의는 점잖게 나왔다. 주인장은 그가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는 예사로운 인물이 아닌 것을 알아 차렸다. 휴의와 같이 왔던 부하는 자신들이 일본군인인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우린 나남사단 소속이요. 19사단 이야기 들어봤지요?

얼굴색이 변한 주인장은 말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휴의는 한 번 더 주인장에게 너의 소개를 빼지 말고 자세히 부탁한다고 정중하게 말했다. 점령군의 부탁은 말이 부탁이지 사실은 그것이 명령이라는 것을 음식점 주인이 모를리 없었다.

명령을 피할 수 없었던 그는 언제부터 일했고 하루 수입은 얼마며 단골은 누구이며 그들이 와서 하는 대화는 어떤 것인지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이 정도면 됐지 않았느냐고 상대의 얼굴을 살피던 주인장은 손님이 밀렸으니 이제 가도 좋은지 처분을 기다렸다. 휴의는 주인장이 하지 않은 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주인장 역시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뱉지 않고 안에 숨기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지 않겠는가. 위세를 부리는 사람이 어떤 이유로 그러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까지말할 수는 없었다. 주인장은 그러나 답답했다. 그들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밖으로 나온 그는 떨고 있었으나 내색하지 않으려고 꾹 참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쳐다보는 눈초리가 사납고 곧 이어서 무언가 큰 봉변이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몰려왔다.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까 고민하던 그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오늘 음식값은 공짜라고 했다. 그러면서 받은 돈에 자신의 돈을 얻어 휴의에게 내밀었다.  주인장의 태도에 휴의가 잠깐 눈을 치뜨자 그는 곧 내민 손을 거둬 들이면서 언제든지 오시면 오늘의 보답을 하겠다고 납작 엎드렸다.

이거 내가 빚진 신세인 걸. 어떻하지. 주인장은 그러는 와중에 머리를 굴려 생각 하나를 끄집어 냈다. 휴의가 젊고 잘 생긴 사내이니 분명 여색에 관심이있을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는 그쪽으로 관심을 돌리려고 했다. 저쪽에 예쁜 조선족 여자가 대기 하고  있어요. 그는 헤헤 거리면서 눈짓으로 방문쪽을 가리켰다.

그러나 주인장의 오산이었다. 휴의가 오늘 온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공들여 한 제의를 깡그리 무시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필요하면 부르지요. 오늘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오. 그는 그러면서 주인장이 가리킨 쪽으로 눈을 돌렸다.

주인장의 말은 사실이었다. 대놓고 몸을 팔지는 않았으나 손님 가운데 제법 큰 돈을 내고 청하면 마지 못해 대령하는 그런 여자들이 있었다. 아니면 휴의 일당처럼 힘으로 무엇을 하려는 자들에게 방패막이로 써먹기도 했다. 아까음식을 들고 온 바로 그 여자가 그 역할을 하는 여자인가 휴의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면서 그 모습에 실망했는지 아니면 그런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지 방문쪽보다는 주인장으로 다시 눈길을 향하고 다른 말 할 것은 더 없는지 물었다. 대답을 망설이자 휴의는 다짜고짜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군. 부대로 가서 혼 좀 나야겠어.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옆에 있는 부하에게 이자를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따라오라, 소리내면 죽는다고 품속에 있는 권총을 슬쩍 내보였다.

주인장은 누가 들을새라 작은 목소리로 살려 달라고 빌었으나 괜히 소란을 피워 사태를 키우지 말라는 휴의의 말에 그만 입이 다물어졌다. 부하가 가볍게 그의 팔을 잡았다. 돈을 드릴게요. 얼마든지 있어요. 부하가 잡은 손이 떨릴 정도로 주인장의 몸은 심하게 요동쳤다. 

주인장은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곤두섰다. 군부대로 끌려가서 제대로 살아온 사람을 보지 못했다.  살려만 주세요. 제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달게 받겠어요. 주인장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체 그렇게 지껄여 댔다. 돈, 돈이 있어요. 그가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휴의는 일단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 그를 다독였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차례 말했는데도 이 자는 알아먹지 못한다. 일부러 그러는 것으로 휴의 눈에 비친 것은 그가 여전히 돈 타령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으로 내가 매수될 사람으로 보였나. 돈이라면 나도 있어. 이 자식아. 그는 주인장의 태도를 이렇게 가볍게 무시했다. 돈으로 매수될 사람으로 자신을 본 것에 대한 나쁜 감정도 품었다. 주인장은 자신의 뜻과는 달리 부대로 끌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는 그가 예상한 것보다 더 나쁘게 흘러갔다. 

휴의는 곧장 심문에 들어갔다. 그러기 전에 윗통을 벗어 제켰다. 런닝 셔츠 안으로 그의 근육질 몸매가 드러났다. 겁에 질린 주인장은 살려만 달라고 두 손을 빌었다. 인간은 이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다. 아직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자의 얼굴을 보라. 사색이 된 것이 마치 송장처럼 보이지 않는가. 

주인장은 귀한 재주를 가졌소. 남을 숨겨주는 재주는 어디서 배웠소. 다짜고짜 묻는 질문에 주인장은 숨이 턱 막혔다. 어떻게 대답해야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지 머리를 짜냈으나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를 어째야 쓰나. 주인장은 정말로 자신에게 닥친 위기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재주 없습니다. 짜장면 만드는 것이라면 몰라도요. 정말입니다. 그 말을 하고 주인장은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자신의 차례라는 듯이 휴의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야기를 돌려 말하지 않아요. 다시 묻는데 그 자는 지금 어디있소? 어디에 있느냐고요?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인장의 잘못은 없어요. 말하면 그것으로 지금까지 잘못은 모두 무죄가 되요. 알겠어요? 그러니 급하게 대답하시오. 어디에 숨겨 두었소? 

정말이지 그런 일 없어요. 사람 잘 못 본 것 아닌가요? 주인장이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그것은 센스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그러나 희망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이때만해도 주인장은 죄없는 자신이 설마 잘못되기야 하겠느냐는 일말의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잔혹한 일본군이라고 해도 증거도 없는데 무턱대고 불라면서 윽박지르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닌가. 심지어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여기서 마무리 짓고 빨리 나가서 짜장면 만들기 위해 마련한 밀가루 반죽을 해야 한다. 손님이 왔는데 주인이 없어 음식을 팔지 못하면 이런 낭패가 또 어디 있겠는가.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오후는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겠다. 그는 음식점을 걱정했다. 그러나 자신을 걱정해야 옳았다. 

한 가지 꾀가 떠올랐다. 숨겨놓은 것 말고 그가 알고 싶어하는 다른 내용이 있다면 숨김없이 말해서 진실을 보증받고 싶었다. 이 순간 억울해서 미칠듯한 기운이 주인장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다른 사람을 불까. 아무 이름이나 대고 훈춘으로 도망갔다고 말해 버릴까. 아니면 일주일 후에 온다고 했으니 오면 바로 연락 준다고 할까. 갈등은 식지 않았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마구 던져야 할 시점이 왔다는 것을 느꼈다.

휴의가 의자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죽도를 치켜 들었기 때문이다. 이 자는 말로 해서는 안돼. 말로 해서는 안 된다고. 왜 조선놈들은 다 말로 해서는 안 되고 손을 대야 입을 나불대지. 따끔한 맛을 한 번 보시오. 그리고는 목표를 조준하듯 한 발 뒤로 물러나서 죽도를 주인장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가 뒤로 빼고는 반동을 이용해 그대로 날려 버렸다. 머리통을 맞은 주인장이 뒤로 고꾸라 지면서 억하는 외마디 비병을 질렀다. 손쓸 새가 없었다. 손을 댄 머리에서는 피가 줄줄 새어 나왔다. 

다 불게요. 분다고요. 그러나 휴의는 무시했다. 빠져 나갈 기회는 아무때나 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맞은 그자가 어떤 말을 할지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 이름이나 대고 언제 오기로 했다고 꾸며댈 것을 알았다. 이런 자들은 약아빠져서 일단 여기를 모면하고 보려는 심사를 휴의가 모를리 없었다. 

그래서 죽도를 거둬 들이고 의자를 끌어 당기면서 말해 보시오, 진작 그랬더라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 아니오.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아직 쓰러져서 정신을 온전히 차리지 못한 주인장은 겨우 머릿속을 정리하고는 자포자기 심정이 됐다. 분다고 해도 때리니 나더라 어쩌란 말이냐. 그는 답답한 가운데 맞은 부위가 어느 정도 타격을 입었는지 다시 확인하기 위해 손을 머리로 가져갔다. 움푹 패인 느낌이 들었다. 이러고도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머리에서 손을 뗐을 때 붉은 피가 손에 가득 담긴 것을 보고 주인장은 생각보다 부상의 정도가 크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살려 달라면서 무릎을 꿇었다. 그 다음에 휴의가 한 행동을 여기서 적는 것은 독자 혐오에 빠질 위험이 있다.

다만 그것을 신호로 멈추지 않는 매타작이 시작됐다는 것은 알려둔다. 사정없이 때리기를 한 시간 정도 했다. 그리고 휴의는 그 자리를 떠났다. 심문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문이 목적이 아니라 구타가 목적이었고 공포가 목적이었다.

반죽음 상태의 그는 사진이 찍힌채 마차에 태워졌다가 자신의 음식점 문앞에 버려졌다. 소문이 금새 퍼진 것은 아니다. 한두명 본 것만으로는 더디고 부족했다. 그런데 중요 장소마다 사진이 붙고 나서 상황은 달라졌다. 흑백의 사진으로도 그가 얼마나 처참하게 당했는지 보는 사람들은 마치 사진속의 인물이 자신인 것처럼 치를 떨었다. 무슨 중죄를 졌기에 이런 상태냐고 어떤 사람들은 사진 속의 인물을 나무라기도 했다. 

까막눈인 그도 그 내용을 아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군중 속에는글자를 아는 사람도 있었고 그들은 옆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이렇게 떠들었던 것이다. 조선 독립분자를 숨겨둔 자의 최후는 이렇다. 누구든 조선독립을 외치는 자는 이런 꼴을 당하게 된다. 

주인장의 눈은 사라졌다. 눈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얼굴이 부어서 보이지 않았고 코는 원래 자리가 아닌 다른 곳으로 밀려났고 벌린 입에는 앞니는 물론 도합 8개 이빨이 빠져 있었다. 8개가 빠진 것은 어떤 이가 나름대로 세어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얼굴만 크게 확대한 사진에 만주 시민들은 공포 그 자체였다. 마적단 소탕을 빌미로 무차별 시민을 학살한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인은 물론 한인들의 피해가 무지막지했고 그것을 어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집은 불타고 여자나 어린애까지 수 백명이 학살당했다. 압록강 부근에 사는 주민들은 떠오르는 시체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처음에는 장사 지냈으나 나중에는 하도 많아 보고도 못본척 눈을 돌려야 했다. 그 날의 악몽이 재연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사진 아래에 조선독립분자를 숨겨둔 자는 앞으로는 주인 뿐만 아니라 가족과 사돈의 팔촌까지 멸족한다는 무시무시한 경고가 붙었다는 사실이다. 방 아래서 그 내용을 읽던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혹시 네가 그런자를 숨기고 있지 않느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서로 눈이 마주친 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슬금슬금 자리를 내뺐다. 공포로 통제하려는 휴의의 작전은 이 정도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아니 완벽하게 성공했다. 그는 이런 일을 하려면 얼마나 더 잔인해져야 하는지 알았다. 얼마나 많은 피 냄새를 맡고 얼마나 많은 짐승의 소리를들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애국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험난해도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가 휴의가 애창하는 애창곡의 한 구절이었다. 

내키는 일을 하려면 내키지 않는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는 것처럼 중국집 주인은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다. 그는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미움도 없었다. 주먹지를 하고 욕을 하고 걷어 찰때도 그가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조선 독립분자가 싫어서 그랬던 것이다. 그가 찬 것은 따라 주인장이 아니라 놓친 조선청년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휴의의 장점이었다. 그런식으로 자신을 합리화 하자 폭행은 되레 그의 정신이 안정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것을 휴의는 알고 있었고 알고 있다는 것은 모르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그 날 밤 휴의는 편하게 잠을잤다. 일어났을 때 몸이 너무나 개운했고 휴의는 자신이 한 일 때문에 숙면에 들었다고 판단했다.

정말로 그랬다. 남의 한 일이 아니라 자신이 한 일 때문에 평가받는 사실이 너무나 좋았다. 그로 인해 그는 현명한 사람이 되었다. 누가 알아서 붙여준 것이 아니다. 순전히 스스로의 노력 때문이었고 휴의는 앞으로 자신이 어디까지 뻗어나갈지 예측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세를 타고 있었다. 

부모 잘 만나 단단히 한밑천 잡은 게 아니다. 오로지 내 노력만으로 여기까지 왔다.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실력을 믿었고 실력은 그를 겁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여명을 받으며 일어난 휴의는 새옷으로 갈아 입었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이 완전히 새로 태어났다. 그러나 새로 태어난 휴의는 자신이 그렇게 됐다고 뻐기지 않았다. 

속으로만 다시 태어난 것을 자축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은 자신을 위해 좋은 습관이 아니었다. 내가 여기까지 왔다고 뽐내는 것은 하류인생들이나 하는 경솔한 행동이었다. 겨우 거기에서 멈출 휴의가 아니었다. 자신도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 인지 알지 못하는 휴의 정도의 큰 인물은 칭찬을 받아도 ,꾸중을 들어도 낯색을 바꾸지 않는 내공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는 반대편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길은 오직 외길이고 이 길만이 그가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외길에서는 거칠고 험한 일을 해도 당당했다. 자신에게 조국에게 동료에게 부대장에서 부끄러움이 없었다. 양심이 온전하게 달려 있었고 그것은 그가 하는 일에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죽마을 떠난 지 불과 이 년에 만에 이룬 성과였다. 농사일 걱정하던 앳된 청년은 이제 만주 벌판을 호령하는 관동군의 초급장교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얼마나 바쁘고 하는 일에 신념이 찼던지 고향에 대해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 어쩌다 생각이 나면 그곳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한 달이라도 먼저 입대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큰 사람이 됐을 것이라는 뒤늦은 후뢰가 밀려왔다. 

그러나 더 늦지 않고 지금이라도 이 위치에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부대장이 상부 보고를 이유로 부대를 떠난 후 휴의는 아주 짧은 휴식을 취했다. 그는 자신의 관사 문을 열고 밖을 보았다. 세월은 좋았고 그 좋은 세월에 꽃들은 사방에서 피어올랐다. 벚꽃이 만개한 것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오랫만에 고향이 눈앞에 어른 거렸다. 해마다 봄이면 작은 묘목을 가져와 학교 운동장에 심었고 큰 길가에 커가는 나무는 모두 벚나무였다. 어떤 날은 어른들 까지 와서 나라나무를 심었다.  

학교를 오가면서 휴의는 자신이 심은 나무가 작년과 다르게 올해 더 커진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도 이 나무처럼 해마다 크고 두꺼워지는 것이 좋았다. 벚꽃은 일본 국화였다. 아니 우리나라 꽃이었다. 그래서 휴의는 만주에서 보는 그 꽃에 더 애정이 갔다.

모처럼 꽃을 보자 그는 마음이 차분해졌다. 꽃을 보고 쉬다니. 내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하는 감탄이 아니었다. 나랏꽃을 보면서 애국심을 더 키웠고 하루빨리 조선독립군을 소탕하고 만주를 넘어 중국 전체를 집어 삼켜야 겠다는 의욕이 앞섰다. 누구보다도 자신이 먼저 그 일을 하고 싶었다. 그에게 이 일은 천직 그 이상이었다. 다른 일은 상상할 수도 없었는데  문득 부대장이 거쳐왔던 교관의 길은 어떤가 그려봤다. 본국의 수도 도쿄나 경성에 가서 제자들을 키우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여기서 배운 실전 경험은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그것을 후배들에게 전수시키는 것이 또다른 임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육사생도의 모습이 갑자기 눈앞에 어른 거렸다. 제대로 군사교육을 받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대장처럼 일본육사출신이라면, 그는 그런 꿈을 꾸었다. 그러나 지금도 충분하다. 나는 자랑스러운 제국주의의 소대장이 아닌가. 

어느 때든 반동의 세력은 있기 마련이다. 그래 그런 자들은 역사이래 쭉 있어왔어.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지. 그런 자들을 미리 잡아들여 후환을 없앤 나 같은 군인 때문이었어. 그것도 사명감이 투철한 군인말이야. 우리가 아니라면 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애국심만으로 시간을 보내기는 어려웠다. 

갑자기 점례는 잘 있을까. 완용은 왜 점례의 소식을 말해주지 않았는지 휴의는 그것이 가끔 궁금했다. 완용의 말마따라 정말 몰랐을 수도 있다. 알고서 알려 주지 않았다면 그것이 조직의 비밀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맞아. 나는 그때 아무것도 아니었지. 그러니 완용이 말할 이유도 없었고.

지금 만나면 다른 대답을 듣게 될거야. 그나저나 완용은 어디까지 승진했을까. 순사부장 정도는 됐을까. 아니 그 정도는 아닐거다. 조선에서 조선인 순사부장은 그야말로 특출나야 되니까. 아니다. 완용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다. 그래 그는 순사부장으로 휘하의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겠지. 그러고 보면 그와 나는 같은 길을 하고 있어. 

그런 생각이 들자 휴의는 완용과 자신이 닮은꼴이라는 생각을 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봉사하는 것. 만나게 되겠지. 조만간 일지 일년 후가 될지는 모르지만 만날 수 있을 거야. 내가 조선에 파병될 수도 있고 완용이 만주를 방문할 수도 있지. 서로는 지금 자신의 위치를 모르지만 만나면 놀라게 될거야.

그래 그와 경쟁하자. 선의의 경쟁. 그가 잘되고 나도 잘 되고 서로 잘되면 좋겠다. 털어 놓고 이야기한다면 그때는 달랐던 것이 서로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무언가 조금이라도 숨길 필요없다. 그와 나는 한 배를 탄 동지가 아닌가. 그래, 완용과의 관계는 여기서 마무리 짓자. 서둘러 이렇게 생각을 정리한 것은 다시 점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본토 근무를 부대장에게 건의해 볼까. 근무는 아니더라도 출장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일본에 갈 수 있을까. 거기 가면 정신대로 간 점례를 만날 수 있을까. 그녀는 지금쯤 얼마나 숙련된 모습으로 총알을 만들고 비행기 부품을 조립하는 일을 할까. 점례 정도의 성실한 사람이라면 작업반장을 하고 있겠지.

그래, 점례는 똑똑하고 야무저. 일본어도 나보다 더 잘할거야. 휴일이면 도쿄 시내를 예쁜 옷을 입고 걸어가는 점례를 상상하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휴의는 점례 생각을 하지 않고,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문득 문득 이렇게 떠오르는 얼굴로 기분이 좋았다.

고향도 부모도 거리만큼이나 자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점례는 늘 자신의 근처에서 이렇게 맴돌고 있었다. 내가 이 정도 위치에 있는 걸 점례는 알까. 알면 나를 더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지 않을까. 여자는 남자의 지위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지 그렇고 말고. 내년에는 중위로 진급하자. 그리고 부대장이 소령이 되면 나는 대위가 되 있겠지. 어쩌면 내가 부대장보다 먼저 진급할지 몰라. 휴의는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점례는 아냐. 자신의 출세에 점례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가능하면 일본여자와 결혼해야지. 그것도 평민이 아닌 장교의 자식이나 정치인의 먼 친척이라면 더 좋겠지. 점례는 잊자. 시골 촌뜨기를 기억하다니. 내가 누군데. 감히 점례 따위가 내 인생에 끼어들어. 휴의는 그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듯이 인상을 찌뿌렸다. 

그는 부대장을 통해 그것을 배웠다. 스스로 양반이 아니라면 양반의 처녀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 그래야 뻗어 나가는데 도움이 된다. 예상치 못한 위기의 순간에는 그곳에서 쉽게 빠져 나 올 수 있다. 점례를 이런 이유로 제켜 놨으나 그점례의 그림자 마저 완전히 떨쳐 낸 것은 아니었다. 생각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실천은 못해도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은 그것대로 나두기로 했다. 떨어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떼내지 않았다. 그러나 상념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는 더 머물면 골치만 아를 것 같아 옷을 챙겨입었다. 나돌아야 잡념을 떨칠 수 있다. 노느니 시내 정탐을 나가자.

제국주의의 성공을 위해 잠시라고 엉뚱한 곳에 한눈을 파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 그는 자신을 자책했다. 다시는 그러지 말자는 의미로 뺨을 조금 세게 꼬집었다. 정신 찰려 이 놈아. 어떻게 여기에 왔는데 그깟 점례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니. 군화를 챙겨 신으며 그는 이렇게 중얼 거렸다. 그가 끈을 조이고 막 나가려고 할 때 밑의 졸병 하나가 급히 다가왔다.

엊그제 잡아온 조무래기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고문 끝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으냐고 물었다. 휴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죽든 말든 죽으면 알아서 처리하라는 듯이 가볍게 응수했다. 네가 알아서 해. 나는 시내 정탐좀 하고 온다. 

그런데 졸병이 이 자가 아무래도 독립군 조직의 상부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입을 열지 않는다고 미심쩍은 눈초리를 보냈다. 상부 조직을 안다고. 휴의는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그가 어떤 자인지는 간략히 알고 있었으나 그 정도라면 자신이 직접 취조해 볼 가치가 있었다. 

누구든 걸리기만 하면 만주 시내서 얼쩡거리는 조선 출신은 잡아 들이다 보니 한달새 벌써 삼십 명이나 그렇게 됐고 두 명을 죽이기도 했다. 그 결과로 일이 잘되어 간 측면이 있다. 죽음의 효과는 컸다는 말이다.

만주의 조선인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독립군의 하부조직 일부를 찾아내 방을 붙인대로 일가를 멸족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부대장은 이곳 활동은 이 정도에서 끝내고 상해로 다음 달에 이동해 본거지를 아예 박살 내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만주의 활동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 들었다. 휴의가 조금 여유를 부린 것도 더 볼 재미가 이곳에서는 사실상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작전 종료 직전에 휴의는 자신의 부대가 재미 삼아 음식점에 있는 모든 사람을 체포했고 그 가운데 조선족 청년 하나를 잡아 온 것을 기억했다.

점심이 훨씬 지난 오후 세 시경 소대병력은 연습삼아 혹은 남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작전을 펴 음식점을 에워쌌고 그곳에 있는 주인장을 포함해 13명을 부대로 끌고왔다. 일주일 전이었다. 

신분이 확실한 중국인 주인과 나머지는 그날 밤 다 석방됐는데 조선 청년 하나는 잡아 두었다. 이 청년도 의심 때문이 아니라 출타에서 돌아오면 부대장에게 자신들이 일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냥 잡아둔 것이었다.

그래서 휴의도 직접 심문에 가담하지 않고 졸병이 심심풀이로 아무거나 묻고 형식적인 보고서를 쓴 다음 석방하려고 했다. 잔혹한 짓이 되레 역풍이 불어 민심이 이반 될 것을 두려워 이제는 좀 살살하라는 부대장의 유화정책도 한몫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잡혀 온 그 시간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음식도 먹지 않고 그냥 주는 매만 맞고 있다는 것이다. 휴의는 직감적으로 그 자가 독립군 일망타진의 어떤 실마리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눈이 번쩍 뜨였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심문해 보기로 했다. 몰골이 엉망이 된 모습에 휴의는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이 직접 한 고문의 결과가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은 확실히 싫은 느낌이었다. 너무 심했어. 인간이 어떻게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 짓을 해. 그는 부하를 나무랐다. 이제는 적당히 하자. 부대장님의 지시도 있었잖아.

그런데 의문이 들었다. 아무 잘못이 없다면 굳이 입을 봉하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처음에는 부하하게 들었던 억하심정이 이제는 조선청년에게로 곱지않은 시선이 갔다. 

뭐랄까, 사람이 어떻게 저 지경이 되고도 참을 수 있지 하는 지독함에 대한 경멸 같은 것이었다. 의자에 묶인 그는 완전히 허물어져 있었다. 그는 돌아서서 그냥 나갈까 생각했다. 곧 죽을지도 모를 녀석에게 이것저것 묻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돌아섰다. 지금까지의 용의자와는 달리 어떤 이상한 기분이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는 부하에게 물을 끼얹어 정신이 들게 하라고 지시했다. 찬물을 맞은 얼굴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가 옆으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다시 물이 쏟아졌고 청년은 약간 정신이 돌아온 모양인지 실눈을 겨우 뜨고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휴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을 구사하고 싶었다. 고문 말고 색다른 취조가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고문이 가장 빠른 자백의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정신이 강한 사람에게는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자신만이 세운 원칙이 그 순간 작동했다.

처참해 졌음에도 이름이나 나이조차 밝히지 않은 이런자에게는 고문이 더는 통하지 않는다. 한 참 후 깨어난 그에게 휴의는 심문 대신 치료를 시작했다. 상처를 꿰매주고 약을 먹였다. 그는 거부하는 몸짓을 보였으나 그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그들이 고문할 때처럼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삼 일간 안정을 취한 그는 거의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휴의는 밥을 들여보냈다. 씻을 수 있는 따뜻한 물도 제공했다. 나름대로의 대접이었다. 그 다음날 휴의는 조선 청년을 찾았다. 그리고 귀중한 보석을 감정하는 듯이 청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상대는 무안을 느끼지 못했다. 아직 기력을 다 찾지 못했다.

부대장은 베이징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을 모두 내보낸 뒤 단둘이 남자 조선 청년에게 일본말이 아닌 조선말로 질문을 시작했다.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휴의는 긴말 대신 짧은 말의 문답을 원했다. 친절한 행동을 했으니 너도 그에 보답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미안한 감정이 들기를 바라면서.

시작은 우리가 먼저 했으나 매듭은 그가 져야 한다. 애처로웠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가 아무말 이나 한다면 못이기는 척하면서 이자를 풀어 주고 싶었다. 어차피 곧 상해로 떠나는 마당에 선의를 베풀고자 했다. 말하자면 만주와 작별하면서 화해의 손짓을 내미는 것이다. 그러고도 싶은 심정이었다. 

혹시 알겠는가. 내가 독립군에 잡혀 취조를 당할 수도 있다. 그때 이 선행이 보답을 해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눈곱만큼도 바라지 않았지만 말이다.휴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질문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대신 말을 걸어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사슬에 매어 있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나이니 이야기의 주도권을 가져도 좋다고 허락했다.

알고 있거든 말하고 모르거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 둘러댈 것도 거짓으로 말할 것도 없다. 하고 싶은 말은 해도 좋다. 그래야 죽어도 속 시원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어서 이곳을 떠나 애초 네가 놀던 곳으로 가라. 

대답을 거절한다고 해서 내가 물러나지 않을 거라는 인상도 주지 않았다. 윽박지르지도 않고 불어라, 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잘못 잡아 왔으면 정중하게 사과하고 돌려보내겠다. 그런 방식은 통하지 않아서 이런 방식으로 대한다는 비아냥도 없었다.

밑천이 달려 새로운 방법을 쓰는 것은 아니다라고 휴의는 그가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말했다. 내가 나섰으니 불든 죽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양자택일로 몰지도 않겠다고도 약속했다. 네 기억에 자신이 없으면 기억나는 것만 말해도 좋다. 무언가 무서운 일이 남아 있다는 공포는 더는 느끼지 않아도 된다. 변명해도 괜찮다.

날개가 빠져 죽어가던 두 발 달린 새가 동면에서 막 나온 뱀처럼 꿈틀거렸다. 금세 꺼져 갈 것 같은 그의 흐릿한 눈에 기름 먹은 심지를 타고 올라온 불길처럼 잠깐 빛이 났다. 미리 준비한 말이 있기라도 한듯이 조선 청년이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였다. 말해도 좋을 인물인지 아닌지 판가름 하려는 듯 두 눈이 상대의 눈을 응시했다.

휴의는 누군가의 든든한 보호자가 자신이라도 되는 듯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응수했다. 너보다는 내가 훨씬 침착하니 아무말 잔치라고 해보라고 그래야 억울함이 풀리지 않겠느냐고 은근한 눈빛을 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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