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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휴는 점례의 귀국 사실을 신문을 통해 사전에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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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휴는 점례의 귀국 사실을 신문을 통해 사전에 알고 있었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2.0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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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와 점례는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었다. 어쩌면 자신들의 인생에서 어떤 큰 전환점이 될 처지에 있었다. 몰려 있는 것은 점례였다.

자칫하면 생명도 위험할 수 있다. 물건을 정리하면서 점례는 서랍속의 삼촌 편지를 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다른 물건 속에 넣으려고 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꺼내서 읽어 보았다.

유지가 읽어준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가 아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거기에다 삼촌과 함게 지낸 세월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이 더해졌다. 낯익은 글씨체를 보고 떠오르는 인자한 얼굴에 점례는 잠깐 동안 작은 미소를 짓고 행복했다.

그러다가 추신 부분에 눈이 머물렀고 그 역시 유지처럼 내용을 알고 말았다. 아침 햇살은 아니었다. 지는 저녁놀의 강한 볕은 아침의 그것과 다를 게 없었다.

사쿠라라 바람에 흩날렸다. 그리고 점례는 자신이 귀국해야 하는 이유를 알았다. 아니 본만 못한 것은 아니었다. 보지 않았다면 자신의 처지가 애처로왔을 것이다. 점례는 자신이 몸이 가랑잎처럼 떨어지면서 떨리는 것을 느꼈다.

유지가 단순히 휴의와 아는 사이라는 것을 의심했다면 점례는 그렇게까지 떨 필요가 없었다. 조선에서 최고로 높은 몸값을 하는 사람이 휴의라는 것이 문제였다.

김구나 밀양사람보다 높다면 휴의는 도대체 어떤 중책에 맡고 조선에 잠입했는가. 점례는 그가 그 일에 빠져든 것이 질긴 자신의 운명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 빠졌다. 여기서 점례는 삼촌을 나무랄 수 없었다. 

삼촌은 편지를 보내고 난 후 나름대로 휴의를 잡기 위한 덫을 차곡차곡 쌓아놓기 시작했다. 귀국에 맞춰 그녀에 대한 홍보를 대대적으로 했다. 조선 최고의 화가가 파리 유학 1년 3개월 만에 대작 수 십점을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 각 신문에 보도됐다.

동행인은 일본 내부대신의 아들로 태평양 전선에서부터 함께 한 유지 호사카로 소개됐다. 점례가 주 내용이었으나 마지막 한 줄은 유지에게 할애했다.

동행하는 유지는 파리에서 단편 하나를 발표했는데 그곳 문단에서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만큼 문학적 성취를 이룬 거물이라는 평이 뒤따랐다. 장편 하나를 준비하는데 이것 역시 벌써부터 출판사 끼리 경쟁이 벌어질 정도로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

신문에 이런 기사를 제공한 삼촌은 조선에 있는 휴의가 반드시 이 기사를 볼 것이라는데 의심하지 않았다. 총독부 이차 공격을 준비하는 그가 신문의 기사 한 줄도 놓칠 수 없고 그것은 그에게 굉장히 중요한 업무의 일환이라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굳이 내무대신의 아들이 동행한다는 사실을 알린 것은 일종의 역정보였다. 내부대신의 아들이 조선에 온다면 총독과 면담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조선의 고위급 인사들과의 접촉은 필연적이다.

점례는 그의 동선을 알 것이다. 휴의는 점례의 동선을 살피면서 디데이를 결정한다. 예측가능한 미래였다. 과연 그 예측대로 흘러갈지는 누구 보면 알 것이다. 

삼촌이 점례를 통해 휴의를 잡기 위한 미끼를 던졌다면 휴의는 점례를 통해 총독의 일정을 파악하고 더 큰 작전을 세우려 들것이다. 이 역시 예측 가능한 상황이다. 

이처럼 점례는 양쪽에서 필요한 존재였다. 조선총독부는 휴의가 미군 특수부대의 폭파전문가 과정을 이수한 사실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했다.

인간 병기로 변신한 그가 조선에 온 것은 지난번 총독부 습격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각오였다. 어떤 식으로든 공격전에 그를 체포해야 한다. 몸값이 높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탓이다.

유지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점례가 편지 내용을 알지 못하리라는 것을 전제로 한 가상이었다. 점례와 휴의가 알고 있는 것은 이제 기정사이다. 어쩌면 나를 알기 전에 둘이 미래를 언약했는지도 모른다.

점례가 삼촌 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휴의가 그녀를 몰래 찾았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둘이 했던 언약을 재확인했을 지도 모른다. 둘은 나와는 다른 어떤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번 조선 방문에도 휴의는 점례를 만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한다. 그가 점례와 만나는 순간 삼촌 집 주변을 꼼꼼하게 에워싼 일경은 때를 놓치지 않고 휴의를 체포한다.

자, 그러면 점례는 어떻게 되는가. 휴의의 체포로 모든 것이 끝나는가. 아닐 것이다. 점례에 튀는 불똥은 무시 못한다. 점례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시치미를 뗀다면 먹혀들까.

시치미가 아니라 실제로도 점례는 이 놀라운 체포작전을 알리가 없다. 아는 사람이, 한때 연정을 품었던 사람이 느닷없이 찾아오면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이 잠깐 만날 수 있다.

그것이 죄가 되는가. 된다면 되고 안 된다면 안 된다. 이쯤에서 유지는 점례를 살릴 것인지, 아니면 이 정도 인연에서 그녀와의 관계를 단절할지 심사숙고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곧 중단됐다.

그녀는 여러모로 대단한 존재고 그냥 버리기는 너무나 아까웠다. 전과는 다른 눈으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역적을 연모하는 여자를 똑같은 눈으로 똑같이 평가할 수는 없다.

유지는 혼란스러웠다. 자칫 자신의 처신이 아버지를 위태롭게 할수도 있었다. 일단 가보자. 가보고 나서 편지 내용을 점례에게 알려 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논의하자.

아버지에게는 이 일을 철저히 비밀로 하자. 그렇지 않아도 정신없는 아버지에게 부담을 줄수는 없다. 비행기는 일본 땅에 곧 도착한다. 거기서 군용기로 조선에 가야 한다.

그러기 전에 아버지를 먼저 만날지 아니면 조선에서 일을 마무리 짓고 만날지도 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그런 고민을 점례가 눈치챘다. 그래서 덜어주기 위해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서 아버지를 뵈어야지요.'

점례가 확신하는 듯한 태도로 물었다. 유지는 자신이 아버지 생각을 하는데 점례가 아버지를 꺼내자 자신의 생각을 들킨 사람처럼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와 나는 이처럼 생각도 일치한다. 유지는 그런 점례의 손을 꼭 잡았다.

'어떻게 하면 좋겠어?'

역으로 유지가 물었다.

'글쎄요, 이번 경우는 나도 판단이 잘 서지 않네요. 난 당신이 하자는 대로 따르겠지만 아버님께 인사 정도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조선에 가는 것이 불난 집 불을 끄는 것처럼 시급한 일은 아니잖아요?'

'그렇군. 잿더미도 없는데 그리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말이지?'

'알아 듣는군요. 편지에서 다 하지 못한 말들을 나눌수도 있고요.'

'그렇긴 하지. 하지만 썩 내키지가 않아.'

'그러면 다음으로 미뤄요. 그게 좋겠어요.'

'당신 그림을 삼촌에게 보여주고 칭찬하는 모습을 어서 듣고 싶어. 조선에 도착하면 기자회견을 해야 할 거야.'

'나도 그 정도는 예측하고 있어요. 삼촌은 미리미리 준비하는 스타일이니까요. 내 그림이 삼촌에게 도움이 됐으면 싶어요.'

'아마 숙소도 마련했겠지. 아니면 바로 조선호텔로 가자. 거기에 짐을 풀고 삼촌에게 연락하자.'

'서운해하실 텐데요. 이층의 넓고 쾌적한 공간을 두고 호텔로 들어가면 화를 낼지도 몰라요.'

'아니야, 우린 이제 독립했어. 성인이고. 혼자가 아니고 둘이 잖아. 간격은 지켜야지. 삼촌이라고 해도 너무 가깝고 너무 모든 걸 알면 되레 서먹해지는 것야.'

'인정.'

점례는 유지가 간혹 쓰는 말을 따라했다.

'당신 말이 맞네요.'

'숙소는 조선호텔로 하자. 어때?'

'좋아요. 거기라면 총독부하고도 가깝고 여러모로 편리하겠네요.'

점례는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이렇게 명확하게 얘기할 때가 좋았다. 당신이 결정을 내주니 마음이 한결 편해요. 나는 결정하는게 너무 어려워요. 그러니 왠만한 것은 상의하지 말고 통보해줘요. 그러면 난 당신을 따를게요. 점례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주어 담았다.

'맞아, 도착후에는 질문 내용을 좀 점검하고.'

이번에는 점례가 유지의 손을 꼭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찻잔을 잡았을 때처럼 온 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 무렵 동휴는 일생일대의 모험에 직면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휴의를 산채로 잡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몸 속의 모든 것을 짜내서라고 그를 잡아야 한다.

사진은 확보했다. 중요한 길목마다 '초특급 현상 수배범' 휴의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관공서는 물론이고 총독부 담벼락에도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경성역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은 어디서든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조선에서 총독보다 더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가 숨을 곳은 어디에도 없을 듯 보이지만 그는 여전히 조선에서 활약하며 종로서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경찰을 믿지 못하는 총독부는 조선헌병대 사령부까지 동원해 휴의 체포작전에 나섰다. 경찰과 군이 서로 공을 차지하기 위해 역정보를 흘리기도 했고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기도 했다.

그의 체포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동휴도 점례의 귀국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신문을 통해 확인하기 전에 정보통을 통해 점례의 조선행을 확인했던 것이다. 미리 안 만큼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직 효과를 보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래 어서 오라. 그리고 휴의와 만나라. 그 자리에는 너희 둘뿐만 아니라 나도 있다. 죽마을 친구 넷 중 셋이 모이는구나. 그나저나 용희는 죽었나 살았나. 내가 그것 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일단 너도 잡고 휴의도 잡자. 지금까지는 용케도 견뎌왔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네 운명도 여기서 끝장이다. 네가 태어난 곳으로 보내주마. 그러기 전에 죽마을 동창회를 열자. 회포를 풀자.

술잔에는 술 대신 붉은 피가 들어있을 거다. 그러자 그 앞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휴의가 보였다. 그는 거만하고 자심만만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멧돼지의 씩씩한 기운이 그를 감싸고 돌았다. 그래, 이거야. 내 애국의 앞길을 막는자는 그가 누구든, 신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 부득이 그랬다면 다른 곳에서 삶을 좇아야 했다.

숨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깨닫게 해주마. 천황과 대일본 제국을 욕보이는 짓을 한 자 더이상 이땅에 붙어 있을 수 없다. 너에게 최선책은 나에게 체포되는 것이다. 차선책은 스스로 죽는 것.

동휴가 일본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몇 번 휙휙 날을 휘둘렀다. 다급한 날이 바람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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