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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편집 2024-03-29 00:50 (금)
편지를 꺼낼 때의 따스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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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꺼낼 때의 따스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 의약뉴스 이순 기자
  • 승인 2022.11.26 19: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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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에 앉은 점례는 기울어 가는 오후의 빛을 감상했다. 이 층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플라타너스 잎이 지고 있었다.

바람이 강해서가 아니라 계절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의 잎은 제명대로 살다가고 있다. 정해진 시간을 채우고 가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앙상해진 가지는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생명은 시작되고 있다. 손에 든 편지를 점례는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편지는 밝게 시작했으나 불안했다. 전쟁을 낙관하다가 어느새 비관적으로 변해갔다.

'우리가 이기는 것은 분명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패전에도 대비해야 한다.'

이기는 것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에 있었다. 점례는 일본이 전쟁에 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정세에 밝은 내무대신이 아들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일본이 전쟁에 진다. 그러면 조선은 어떻게 되지?'

제일 먼저 드는 의문은 그것이었다. 이기든 지든 점례는 그것이 자신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조선에 있다면 모를가 여기는 파리 아닌가.

점례는 그것이 조금은 안심이 됐다. 그녀는 마시다 만 커피잔을 들었다. 먹기 좋게 식은 잔에서 묵직한 원두 맛이 묻어났다. 한 모금 마신 그녀는 다시 편지에 눈길을 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의견을 물었다. 지난번 편지에서처럼 군인인 아들이 어떻게 현재를 보는지 궁금해 했다. 그것은 아들의 의중을 떠보는 것임과 동시에 그에게 정치적 수업을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의원직을 물려 주면서 아들을 정치인으로 키우려는 또 다른 야심을 갖고 있었다. 내무대신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전후 세계는 엄청난 격랑에 휩쌓이고 그것은 정치가 해결할 문제였다.

일본의 정세와 대응을 자세히 써보낸 것은 그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일단 이겼을 경우는 생략하겠다. 다만 가정이지만 질 경우다. 우리는 최대한 항복을 늦추려고 한다. 이것은 황실과도 이야기가 된 것이다. 소련이 아직 참전하지 않고 있다. 소련의 참전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점례는 조금 당황했다. 소련의 참전이 일본에게 불리할 것으로 봤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연합국의 일원으로 소련이 전쟁에 발을 담가야 한다. 아마도 조만간 그런 소식이 들릴 것이다.'

내무대신은 소련의 움직임을 이같이 예측했다. 이것은 단순한 예측이 아닌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소련이 참전할수록 일본은 불리해 지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편지를 그것을 바라고 있다. 다음 말에서 점례는 노련한 정치인의 정세분석에 감탄했다.

'미국 일방의 승리는 일본에게 위험하다. 어쩌면 일본이 둘로 쪼개질 수 있다. 막강한 미국의 힘을 분산시켜야 한다. 소련이 전쟁에 참여하고 독일로 진격하거나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남하할 경우 승전국의 지분은 미국과 소련으로 양분된다.'

그렇구나, 점례는 무릎을 쳤다. 전쟁이 이런 식으로 흘러 가는구나.

'그러면 우리는 비록 패전하더라도 미소 양국의 틈새에서 줄다리기를 할 수 있다. 패전국이지만 패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이럴 경우 물론패전에 대한 책임도 어느 정도 선에서 마무리 할 수 있다.'

아버지는 소련과 접촉을 시도했다. 여러 루트를 통해 소련 서기장과도 대화했다. 눈치빠른 로스케 놈들은 일본이 질 것을 낙관하는 눈치더라. 그렇지 않으면 일본이 나서서 우리에게 손을 내밀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듯 싶다. 유지야, 너는 먼 이국에 있으니 전쟁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거다. 그곳 분위기는 어떠니? 그리고 이같은 아버지 전략은 어떤 점수를 줄 수 있니? 기탄 없는 너의 의견을 기다린다.

내무대신은 아들이 편지를 받자 마자 답장할 수 있도록 글 중간 중간에 아들의 의견을 물었다. 점례는 이번 답신은 유지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쓰기에는 너무 벅찼다.

'지난번 편지는 아버지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다. 너는 판단 내리기를 주저했으나 그것은 옳은 것이었다. 어떤 때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 성급하게 결정하지 않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런 그렇고 너, 글쟁이가 되겠다고? 글쎄 너는 어릴 때부터 글솜씨가 있었다. 백일장에서 상을 타온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너는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최상위에 오를 것을 아비는 의심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림을 포기하다니 여간 아쉬운게 아니다. 하지만 그림보다 더 위대한 것이 글이 아니더냐. 좋은 글을 많이 쓰도록 해라.

점례는 다시 편지에서 눈을 뗐다. 조선여자라는 문장이 보였기 때문이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다시 커피잔을 들었다. 그새 커피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식은대로 커피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리고 너와 함께 있는 조선 여자는 어떠냐? 파리 화랑가에서 인정을 받고있다는 소식은 지난번 편지를 통해 받았다. 대회에서 수상한 적은 있니? 살롱전 같은 것 말이다. 미술잡지에 도판이 실리는 정도로는 너도 만족 할 수 없겠지? 하여튼 네가 글을 쓰고 조선 여자가 그림을 그린다니 볼만 하구나.'

점례는 조선여자라는 표현이 거슬렸다. 차라리 점례라고 표현했으면, 그게 마음에 든다. 그래서 답장을 쓸 때 '아버지 조선여자는 점례에요. 창씨개병한 이름은 점례 마스코고요.'

점례는 그렇게 했으면 싶었다. 조선여자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서로 누가 먼저 꼭대기에 오르는지 각분야에서 경쟁해도 좋겠구나. 그리고 참, 너의 결혼 문제를 상의하지 않을수 없구나. 아빠의 옛 동료 의원이며 황실의 사촌이 늦둥이 딸을 하나 두고 있다. 지난해 동경대 법대에 들어간 처녀인데 인물도 보통이 아니다. 우선 사진을 동봉하니 한 번 보거라. 그리고 네가 일본으로 오던지 아니면 적당한 곳에서 여자를 한 번 만나라. 아버지도 손주가 보고 싶구나.'

이 대목에서 점례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나온 한숨은 불안으로 이어졌다.

'그래 결혼해야겠지. 그럼 나는 뭐가 되지? 뭐긴 뭐야. 하던일 계속하면 되지. 유지가 없더라고 내 앞길을 챙길 수 있어. 그게 가능하냐고? 물론 가능하고도 남지.'

그러면서 그녀는 사진 한 장을 손에 들었다. 대학건물을 배경으로 두꺼운 책을 들고 활작 웃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 여학생이었다. 단발 머리에 교복을 입었는데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잘 어울렸다.

그녀는 사진을 식탁위에 놓았다. 그리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만사가 귀찮았다. 이대로 눈을 감고 한 잠 자고 싶었다.

그러나 잠이 오지 않았다. 등에 손이 닿는 느낌이 들었다. 유지다. 그새 일어났는가. 밥을 먹자 말자 편지를 읽는둥 마는둥 하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던 유지가 점례의 등 뒤에 서 있다.

'그 사진 치우라고 했잖아. 나는 전혀 관심없어. 아버지에게는 미안하지만, 불효자식이라 안됐지만 난 아니야, 결혼할 생각 없다고. 털 끝 만치도 없어.'

'나 때문이라면 신경 꺼도 돼요. 난 당신이 결혼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게요.'

'그런 거 아냐. 알잖아 당신도. 사진 이리줘요.'

'그러지 마요. 아버님이 주신 건데 함부로 하면 안 되요. 나중에 후회한다니까요.'

점례는 사진을 받으려는 유지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옆에 있는 미술잡지 사이에 끼워 넣었다.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해. 안 보이는 곳에 감춰둬. 그러면 나도 조금은 효도하는 셈이지.'

창밖은 어둠이 내렸다. 가로등 불이 희미하게 거실 안쪽을 밝혀 주고 있었다.

'불 켜지 말아요. 그냥 이대로 창밖을 구경해요.'

'어, 그럴까.'

불을 켜려던 유지는 멈칫했다. 그리고 점례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보, 우린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야. 당신을 두고 내가 다른 여자와 사는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없어. 당신은 내 아내며 동지며 친구며 의인이야.'

'그만, 그만해요. 그 정도면 충분해요.'

점례가 유지의 입을 막았다. 그는 점례의 손을 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저녁에 작가 모임에 있어. 아까 말하려다 깜박했군. 나가봐야 해. 미안해 저녁은 혼자서 먹어.'

유지가 일어섰다.

'밤에 나가려고요?'

'어, 빠질 수 없는 저녁 약속이야.'

'술은요?'

'안 먹을 거야. 이렇게 고생했는데 술이 들어가겠어.'

'그래요. 당신 건강도 생각해야지요.'

옷을 챙겨 입은 유지가 급하게 나갔다.

'조심해서 돌아오세요.'

'걱정 마, 일찍 올게.'

점례는 다시 혼자가 됐다. 그녀는 덮은 잡지를 열었다. 사진이 들었던 곳이 바로 펴졌다. 손에 들고 얼굴 가까이 사진을 가져왔다.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어두운 실내에서 그녀는 밝은 빛으로 빛났다. 주변을 환하게 비추는 빛과도 같이 웃는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반짝 반짝 빛났다. 점례는 갑자기 자신이 던져졌다는 것을 알았다.

혼자 내팽겨진 건가?

그녀는 편지를 들었다가 얼른 놓았다. 차가운 얼음을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우편함에서 꺼낼 때 느껴던 따스함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행복으로 가득한 하루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불길한 냄새가 번졌다.  유지가 없는 삶이 과연 가능할까.  위험의 문턱에 들어섰나. 점례는 시골집의 문지방을 넘다 넘어져 머리가 깨진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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